존 스토트, 살아 있는 교회.. by 그루터기


나에게는 교회에 대한 꿈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적 교회로서
모든 점에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충성하고
목사들은 성실하고 적실하게 성경을 해석함으로써
모든 교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모습으로 자라게 하고자 노력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과 그리스도를 닮은 삶으로 장식하고
모든 비성경적 강조점에서 보호되며
삶을 통해 성경적 균형의 건강함과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교회입니다.
나에게는 성경적 교회에 대한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교회에 대한 꿈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하는 교회로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기 위하여 
함께 모이고
하나님이 늘 그들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알고
매우 겸손하게 그분 앞에 엎드리고
주 예수님의 식탁으로 정기적으로 자주 나와서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그분의 위대한 구속 행위를 찬양하고
음악적 재능으로 예배를 풍성하게 하고
기도를 믿으며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붙들고
일요일 예배와 기도 모임에서뿐 아니라
가정과 주중의 일과 일상적인 삶에서도 
예배가 나타나는 교회입니다.
나에게는 예배하는 교회에 대한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교회에 대한 꿈이 있습니다.
그것은 돌보는 교회로서
회중은 여러 인종, 나라, 연령
사회적 배경으로 구성되어
하나님의 가족의 하나됨과 다양성을 드러내고
따스하고 환영하는 분위기에서 교제하며
분노나 이기심이나 질투나 교만으로 훼손하지 않고
교인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고
서로 참고, 서로 용서하고, 서로의 짐을 지고
외로운 사람에게는 우정을
약자에게는 도움을 주고
사회에서 멸시받고 거절당한 사람들을 품어주고
사랑, 곧 매력적이고 쉽게 전이되고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 밖으로 흘러 넘치는 교회입니다.
나에게는 돌보는 교회에 대한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교회에 대한 꿈이 있습니다. 
그것은 섬기는 교회로서
그리스도가 종이심을 알고
자신 역시 종이 되라는 그분의 부르심을 듣고
이기심으로부터 구속되고
안으로부터 바깥으로 방향을 바꾸어 
이타심을 갖고 자신을 드려 타인을 섬기고
교인들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복종하여 
세상 속에서 살고, 세속 사회로 스며들고,
이 땅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 되고
사람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친구들과 
단순하게 자연스럽게 열심히 나누고
자신의 교구, 곧 거주자와 노동자, 가족과 독신자
자국민과 이주자, 노인과 어린아이들을 
부지런히 섬기고
사회의 변화하는 필요들에 유의하고
더 유용하게 섬기기 위하여 
프로그램을 융통성 있게 조정하는 
민감함과 탄력성을 지니고
세계적인 비전을 품고 
젊은이들에게 그들의 삶을 섬김의 일에 드리도록
끊임없이 도전하며
섬김을 위하여 끊임없이 사람들을 보내는 교회입니다.
나에게는 섬기는 교회에 대한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교회에 대한 꿈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다리는 교회로서
교인들은 자신이 이 땅에서 
이방인이요 순례자임을 기억하기에
물질적 풍요나 편안함 속에 결코 머물지 않고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고 고대하기에
더욱 더 충성스럽고 적극적이고
어둡고 절망적인 세상 속에서
기독교적 소망의 불꽃을 계속 타오르게 하고
그리스도의 날에 부끄러움으로 그분을 피하지 않고
즐거이 일어나 그분을 맞이하는 교회입니다.
나에게는 기다리는 교회에 대한 꿈이 있습니다. 

- 존 스토트, <살아 있는 교회>, Ivp, 200-202쪽 -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 by 그루터기

지금  이런 일이 생겨야 합니까하나님이 우리를  높은 수준으로 끌고 가시고자 하기 때문에 생깁니다하나님은 이전에는 꿈도 못꾸었을만큼  용기와 인내와 사랑을 발휘해야  상황으로 우리를이끄십니다. ... 조지 맥도널드의 비유를 하나 빌려와야 같군요. 여러분 자신이 살아 있는 집이라고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오셔서 집을 다시 지으려 하십니다. 처음에는 그가 하는 일이 이해가 것입니다. 그는 하수구를 고치고 지붕에 새는 곳들을 막는 등의 일들을 하십니다. 이런 것들은 필요한 일이므로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얼마 집을 마구 때려 부수기 시작하는데, 지독하게 아플 아니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그는 무슨 짓을 하고 계신 것입니까? 그는 여러분의 생각과 다른 집을 짓고 계십니다. 여기에는 한쪽 벽을 새로 세우고 저기에는 바닥을 깔고 탑을 새로 올리고 마당을 만드십니다. 여러분은 보기 좋은 작은 오두막집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궁전을 짓고 계십니다. 그는 친히 궁전에 작정이십니다 … 과정은 길며 부분적으로는 아주 고통스러운 것이겠지만 거기에 도달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C.S.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홍성사, 311-312


시치미.. by 그루터기

무용 순서를 끝으로 우리는 다시 밖으로 나와 줄봉사 노릇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올케한테 미안했지만 말로 나타내진 않았다. 뭐라고 말할 수 없이 비참했다. 거의 자정을 바라보는 시간이었고 온몸이 남루처럼 지쳐 있었으나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이불 속에서 외롭게 절망과 분노로 치를 떨었다. 이놈의 나라가 정녕 무서웠다. 그들이 치가 떨리게 무서운 건 강력한 독재 때문도 막강한 인민군대 때문도 아니었다. 어떻게 그렇게 완벽하고 천역덕스럽게 시치미를 델 수가 있느냐 말이다. 인간은 먹어야 산다는 만고의 진리에 대해. 시민들이 당면한 굶주림의 공포 앞에 양식 대신 예술을 들이대며 즐기기를 강요하는 그들이 어찌 무섭지 않으랴. 차라리 독을 들이댔던들 그보다는 덜 무서울 것 같았다. 그건 적어도 인간임을 인정한 연후의 최악의 대접이었으니까. 살의도 인간끼리의 소통이다. 이건 소통이 불가능한 세상이었다. 어쩌자고 우리 식구는 이런 끔찍한 세상에 꼼짝 못 하고 묶여 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을까.

- 박완서,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웅진출판, 1995, 57쪽 -

유진 피터슨, 부활을 살라 : 삶의 아름다움.. by 그루터기











  유진 피터슨,  양혜원, 박세혁 옮김,  부활을 살라,  IVP,  2010.


하나님 안에서 건강하게 자라고, 사랑 안에서 강해지는 것. 이것이 내가 다룰 주제다. "거룩함의 아름다움"이라고 어느 시편 번역본이 발하는 그것을 찾고 그것에 따라 사는 것. 우리의 정신과 영혼과 삶이 빚어지는 것. 삶이 변화되고, 하나님 안에서 건강하게 자라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는 것. ... 미국인들은(내가 보기에는 한국인들도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일반적으로 성숙이 일어나는 환경에 순응하는 삶을 잘 견디지 못한다. 성숙이 일어나는 환경이란 조용하고, 명확하지 않고, 인내해야 하고, 인간의 통제와 관리에 종속되지 않는 환경이다. 미국 교회는 그러한 환경에 처하면 불안해한다. 그래서 '현실에 참여한다'는 핑계로 미국의 지배 문화에 스스로 순응해 버리고, 머지않아 그 문화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비슷해진다. 말이 많고, 시끄럽고, 바쁘고, 통제하고, 이미지를 의식하는 집단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세속 사회가 교육과 활동, 심리적인 영역에서 추구하는 목표가 교회의 목표가 된다. 인격 형성, 기도의 삶, 거룩의 아름다움과 같은 문제는 특수 목회나 단체에 위임되고, 교회 생활에서는 더 이상 그러한 것들이 중심을 차지하지 못한다. ... 우리는 진리를 위해서 싸우고,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는 일에 열심을 낸다. 선한 일을 주장하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행동하는 일에 열정을 가진다. 그러나 진리와 선이 인간의 삶에서 드러나는 형태인 아름다움은 대체로 무시하고,아름다움을 꽂꽂이 장식가와 실내 장식가에게 맡긴다. ... 아름다움이 없으면 진리와 선이 담길 그릇이 없어지고, 형태가 없어지며, 그것을 인간의 삶에서 표현할 길이 없어진다. 아름다움과 분리된 진리는 추상적이고 혈색을 잃는다. 아름다움과 분리된 선은 사랑과 은혜가 없다. 이것을 일컬을 공식 용어가 필요하다면, '신학적 미학'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 무엇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면서 성숙해질 수 있는 토대는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다. 살아계시고 현존하시는 예수님. 우리의 도움이 필요 없었고 우리의 견해와도 상관 없었던 예수님의 부활을 생생하게 인식해야만 우리의 성장을 직접 책임지려는 태도를 극복할 수 있다. 예수님의 부활을 자주 묵상해야 우리의 대화를 우리가 규정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언어로 축소하지 않을 수 있다. ... 부활을 살 때 우리는 자신보다 더 큰 무엇으로 끊임없이 들어가게 된다. 부활을 살 때 우리는 살아계시며 현존하시는 예수님과 동행하게 된다.  (들어가는 글에서)


유진 피터슨의 영성신학 마지막 권이다. 이로써 유진 피터슨은 영성신학, 영적 독서, 영적 리더십(제자도), 영성 지도(언어), 영성 형성(영적 성숙)이라는 일련의 논의를 마무리지었다. 이 책들은 내게는 잊지 못할 의미있는 책들이다. 마지막으로 달려온 영성의 형성과 성숙의 과제는 삶의 아름다움이다. 그것을 유진 피터슨은 부활을 살아내는 것에서 찾았다. 그리고 이 삶을 교회와 그리스도로 초점을 모두어 간다. 이 때 주목하는 것은 인간을 뛰어넘는 곳으로 들어가는 겸허함이다. 인간이 스스로 소유하거나,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에게 주어진 것을 발견하는 마음, 곧 선물과도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믿음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삶을 낭만화 시켜버리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삶을 규율로 조건화시켜내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를 보고 받아들이고 여기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하시는 일상의 풍성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랑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것은 죽음의 세상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죽음의 나라에서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생명을 끌어아는 일이다. 시간 안에서 영원을 사는 기적이기도 하다. 이는 인간이 해낼 수 있는 일이 될 수 없다. 인간은 그저 참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유진 피터슨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먼저 고백한다. 삼위일체가 하시는 일을 먼저 드러내고, 그 영광의 풍성함을 바라본다. 너무 큰 세상이고, 인간의 말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깊은 곳이다. 그런데 바로 그 속에 교회가 있고, 인간이 초대 받았다. 그 방식에 주목해야한다. 이 모든 과정은 "인격"으로 이루어졌다! 그 증거는 인간의 이름이다. '성도' 거룩한 백성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그것이다. 이 이름은 삼위일체께서 인간에게 부여한 새로운 정체성이고, 그가 우리를 위해서 하시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이 부르심에 인간은 믿음으로 응답할 뿐이다. 여기서 인간에게는 '의도된 수동성, 의지적인 수동성'이 요청된다. 이 때 은혜는 일과 하나가 될 수 있다. 율법도 그리고 인간의 단순한 자발성이나 자연스러움도 아닌 부활을 사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다. 유진 피터슨은 이를 세속주의와 경건주의의 왜곡을 피해하는 길이라 말한다. 

성도라는 이름은 이제 그리스도인을 공동체로 초대한다. 은혜를 믿음으로 받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따르는 성숙의 삶은 개인주의에 국한될 수 없다. 이미 모든 곳에서 활동하시는 삼위일체의 은혜, 그 일에 들어가도록 하기 때문이다. 흔히 혼자서 영적인 삶을 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나 세상을 바꾸겠다고 투쟁하는 실용주의적인 삶도 여기서는 발을 붙이지 못한다. 여기서 익숙해지는 것은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이신 그리스도다. 그래서 교회와 그리스도가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엮어 들어간다. 마찬가지로 개개인은 모든 주어를 그리스도에게 돌려야 한다. 이 때 우리는 '비인격화'의 유혹을 벗어날 수 있다. 인간은 사물화, 대상화에 능숙하다. 자신이 주인이 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삶의 방식은 '인격'과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기 때문이다. 그가 평화를 이루시는 방법, 그것은 그의 피, 그의 십자가였다. 예배는 이를 지키는 중요한 방편이다. 이로써 그리스도인들은 점점 더 큰 곳으로 들어간다. 그리스도와 교회가 머리와 몸으로서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음을 이해한다. 그러면서 더 큰 세계, 이미 삼위일체께서 이루신 세계, 부활의 세계를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그곳이 다름아닌 일상의 삶 한 가운데에서 펼쳐지고 있음을 감지하기 시작한다. 교회는 그 삶을 펼쳐내 보이는 중심이기도 하다. 그래서 교회는 인간적이면서 신적이다. 이 두 가지가 교회에 함께 존재한다. 이 둘을 분리해서는 교회가 교회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종교적 형식만 남게 되거나 비인격적인 과업들만 남게 된다. 이 위험은 상존해 있고, 교묘하다. 그래서 기도가 요청된다. 기도는 인격적인 언어이자 인격적인 관계를 담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는 하나님에 관해 우리가 아는 것을 그분에 대한 우리의 인격적 반응과 결합(247)시킨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그리고 '속사람'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공동체를 지켜낼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삶, 즉 교회라는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방식은 하나님의 성품과 그 분이 교회 안에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방식과 일치되어야 한다.(286) 여기서 부정적인 공간이 중요하다. 부정적인 공간은 우리의 삶을 규정하지 못한다. 우리를 규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긍정 뿐이다. 다만 부정의 역할은 주된 활동, 곧 하나님의 활동을 위한 여지를 마련하는 것이다.(299) 그렇게 하나님의 활동의 여지를 마련하며 살아내는 삶, 부활의 삶은 사랑과 예배로 이어지게 된다. 사랑은 하나님이 그 기원이며 예수님이 그 내용이고 성령이 그 동력이 되시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사랑은 최고의 관계적 언어, 최고의 인격이기도 하다. 예배하는 것은 그 사랑을 살아내며 길러가도록 돕는다. 이제 가장 익숙한 장소에 이르게 되었다. 바로 가정과 일터이다. 그리스도의 풍성함, 그 광대함, 이 모든 깊이와 넓이는 이제 가장 구체적이고 가장 평범한 곳, 인간의 일상으로 펼쳐지게 된다. 교회의 크기와 깊이, 의미도 재확인된다. 교회는 보이지 않는 하늘과 보이는 땅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위한 무대(365)이다. 그리고 부활을 사는 새로운 삶, 그 중심에 있는 인격도 재확인된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굳게 서는' 일이다. 악처럼 보이지 않는 악으로부터, 악으로 알아차리기 어려운 악으로부터, 인격을 비인격화시키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을 축소시키는 모든 악으로부터 '굳게 서는' 일이다. 그 길 또한 철저히 인격적이다. 일상과 초월을 넘나들면서 하나되게 하는 일, 영원을 시간 안에서 살아가는 일,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교회의 의미를 살아내는 일, 삶의 거룩함을 회복하는 일,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일, 그길은 곧 은혜로 들어가는 것이며, 그 은혜를 사는 것, 바로 부활을 사는 것이다. 에베소서를 가지고 이렇게 이야기 해준 유진 피터슨에게 감사를 전한다. 





우리가 그 위에 서있다. 우리 발밑에 있다.. by 그루터기

  부활을 사는 것,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는 것, 더러는 이야기하고 많이 듣는 이 기독교적 삶은 일종의 모나드노크 산 같은 삶이다. 표지판을 보고 거기에 쓰인 글을 읽는다. 이야기를 듣고, 시를 읽고,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를 드린다. 유명한 바울이 쓴 유명한 편지도 읽는다. 에베소서를 읽는다. 그래서 우리는 기독교적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로 하고 가서 직접 봐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리스도인, 부활, 성도라는 말을 곳곳에서 본다. 성지로 여행도 가 본다. 교회도 다녀본다. 하지만 우리가 기대했던 것은 결코 보지 못한다. 산을 결코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오래 전부터 그랬다. 예수님이 팔레스틴 지방에서 사셨던 그 30년 동안 예수님을 보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변에 굳이 알릴 만한 내용을 예수님에게서 보지 못했다. 예수님은 나사렛이라는 소도시에서 장남으로 자랐고, 생애의 대부분을 목수로 지냈고, 결말이 좋지 못해서 범죄자로 십자가에서 죽었다. 당시에 유명했던 몇몇 사람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지만 곧 무시했다. 볼거리가 될 만한 기적을 기대했던 헤롯 안티파스는 실망했다. 빌라도 총독은 의아해했지만 별다른 인상을 받지 못했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경멸했다. 부활하고 나서도 예수님은 여전히 별다른 인상을 주지 못하셨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정원사로 오해했다. 글로바와 그 친구들은 10킬리로미터가 넘게 예수님과 함께 걸으면서 대화를 하고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 흥미로운 대화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이라고? 이 세상의 구주와 대화했다는 사실을 그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 왜 몰랐는가? 더 중요한 일에, 영적인 일에, 성경공부에 너무 몰두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때 예수님이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떼어서 돌리셨다. 그 빵의 질감이 손끝에 느겨지고 그 맛이 혀에 느껴지자(일상에 뿌리박자)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바울은 사흘 동안 눈이 먼 채로 있은 후에야 예수님을 보았다.
  날마다 예수님을 보는 많은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보지 못한다고 하는 것일까? 사진을 찍거나 시의 은유로 사용하려고,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이나 우주적인 빛의 쇼와 카리스마적인 서커스를 보여 주시는 예수님, 산 위에서 변모하시는 예수님을 찾는 것일까? 왜 예수님은 스스로를 선전하지 않으실까? 우리 가운데 계시며 치유하시고 구원하시고 복 주시는 하나님으로 알려지기 원하신다면 왜 우리의 이목을 끄셔서 단도직입적으로 상황을 설명하시지 않는단 말인가? 바울이 우리에게 숙고해 보고 받아들이라고 펼쳐놓는 모든 동사와 명사가 진짜라면, 왜 예수님은 적어도 목청이라도 높이지 않으신단 말인가? 간단하게 대답하면 하나님은 오직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만 자신을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숙고해 보아야 하는 현상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용할 수 있는 힘이 아니다. 하나님은 논쟁해야 하는 명제가 아니다. 하나님에게는 비인격적인 면이나 추상적인 면, 강제적인 면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동일한 인격적 존엄성을 가지고 우리를 대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려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빵을 드시고,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우리가 있는 곳에서 자신의 사랑으로 받아들이시려고 이곳에 계신다. 부활이 거대하고 영광스러운 산인 것만은 분명하다. 바울의 동사와 명사에는 과장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부활을 실천하는 삶은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다. 그 모든 거대함과 영광은 우리 발밑에 있다. 그것은 일종의 모나드노크 산이다. "그것은 여기 있다. 우리가 그 위에 서 있다. 우리 발밑에 있다."

- 유진 피터슨,  부활을 살라,  IVP, 2010. 134-13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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