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보시니 참 좋았다 : 꿈과 이야기.. by 그루터기











 박완서 글, 김점선 그림,  보시니 참 좋았다,  이가서,  2004.


이야기는 매력적이다. 어렵지 않게 상상하게 하고, 그려내면서 사람의 마음을 향해 잔잔하게 손짓한다. 그 손짓이 마음에 닿고 또 닿으면 어느 순간 새로운 세상이 열려진다. 꽁꽁 숨겨져 있던 것들이 환하게 제 모습을 드러낸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이야기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꽁꽁 숨겨져 있는 것들이 제 모습을 드러내게 해준다. 글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몰랐던 세상의 모습이 환하게 드러난다. 제 모습을 보고 싶다는 마음,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는 마음은 꿈과 같다.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꿈꾸는 자가 제 모습을 보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낸다. 사람과 사람의 제 모습을 보고, 세상의 제 모습을 보도록 이끌어내는 꿈과 이야기는 그래서 소중하다. 본래의 생명력, 의미를 되찾아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참답게 산다는 것은 거대한 것을 획득하는 것에 있지 않음은 분명하다. 얼마나 이야기할 수 있느냐, 얼마나 꽁꽁 숨겨진 것들을 바로 볼 수 있느냐, 그래서 얼마나 살아있음을 만끽하며 한가득한 생명을 나누어 가느냐, 얼마나 이런 꿈을 꾸고 있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여러 때묻지 않는 이야기를 들어서 좋았고, 특히 마지막 이야기, "참으로 놀랍고 아름다운 일"의 이야기 속에서 꿈과 이야기를 함께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할머니는 오랫동안 어린이와 만나지 못해서 죽어버린 이야기들을 살려 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서두름이야말로 서투른 짓이라는 것을 할머니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천히 조심조심 죽어 버린 이야기들을 건드려도 보고 따뜻한 입김을 불어넣어도 봅니다. ... 이야기 선물을 마련해 놓고 아기를 기다리는 할머니의 마음은 마냥 찬란하기만 합니다. 할머니가 이야기 선물이야말로 으뜸가는 선물이라고 으스대는 데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습니다. 할머니는 오래오래 사는 동안에 터득한 지혜로,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아무리 보잘것없는 사물이라도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물의 비밀과 만나는 일이야말로 세상을 사는 참맛이라고 할머니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 사물은 제각기 가진 비밀 때문에 서로 평등할 뿐더러 자유롭습니다. 사물의 비밀은 이렇게 제각기 사물이 있게끔하는 목숨 같은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나와 있기 보다는 꼭꼭 숨어 있으려 듭니다. 사람의 꿈만이 꼭꼭 숨은 사물의 비밀을 여는 열쇠가 될 수 있습니다. ... 제아무리 오래 살고 여러 사람을 사귀었어도, 일생을 통해 단 한 사람의 진실과 만난 사람보다 어찌 참으로 살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할머니가 이야기 선물이야말로 아기에게 으뜸가는 선물이라고 으스대고 싶은 것은 이런 까닭에서입니다. 할머니는 아기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줄 작정입니다. 아기에게 꿈을 줄 작정입니다. 아기는 커가면서 꿈을 열쇠 삼아 사람과 사물의 비밀을 하나하나 열 수 있을 것입니다. 참답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아기 오는 날이 가까워질수록 할머니의 나날은 저녁 노을처럼 찬란해집니다. 깜깜한 밤이 오기 전에 잠깐이나마 노을이 있다는 것은 참 놀랍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156-167쪽)





위대한 선물.. by 그루터기

나는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언어와 운율로 기록된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나에게는 주일마다 그 일을 위해 일정한 시간이 확실하게 보장된다. 설교할 수 있는 강단은 내게 위대한 선물이다. 또한 나는 그 선물을 온전히 사용하고 싶다. 교인들로 하여금 일상적인 욕구를 직시하게 하고 명쾌하고 영감이 담긴 '설교를 전달'하는 데에는 흥미가 없다. 학자들이나 편집자들의 도움을 받으면, 일주일에 몇 편이라도 상당히 훌륭한 설교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런 설교는 대다수 교인들에게도 그다지 거부감을 주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 설교가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얼마든지 받아들인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일은 그런 식으로 완성될 수 없다. 나는 성경에 흠뻑 젖어들어야 한다. 성경 연구에 몰두해야 한다. 성경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 개인적으로 진력할 뿐 아니라 성경 구절들을 몇 시간이라도 묵상하고 생각해야 한다. 그런 과정은 단순히 설교를 준비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요구한다. 나는 주일마다 예배에 참석하는 교인들이 특별한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설교를 듣기를 소망한다. 또한 말씀이 그들 삶의 친밀한 영역 속에서 선포된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원한다. 그러나 명확한 개요와 적절한 예화만으로 그런 결과를 끌어낼 수는 없다. 이런 종류의 설교는 고요함과 외로움, 집중과 강렬함을 필요로 하는 창조적인 행위다. 

- 유진 피터슨, 차성구 옮김,  묵상하는 목회자, 좋은씨앗,  2009, 40-41쪽 -

고요함과 외로움, 집중과 강렬함을 필요로 하는 창조적인 행위..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 말..




내일 내일.. by 그루터기

벌써 며칠째..




이성덕, 이야기 교회사 : 디딤돌 by 그루터기











이성덕,  이야기 교회사,  살림,  2007.


우리의 기독교회와 기독교 신앙은 역사의 과정 속에서 탄생하였으며,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역사적인 전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우리의 기독교적 정체성은 이러한 전통 속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기독교인에게는 이 전통을 잘 알아서 소중하게 생각하고 계승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통을 계승한다는 것이 단지 과거의 것을 그대로 오늘에 재현하는 것을 아닐 것입니다. 전통이라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과 전승을 각자의 시대에 맞게 소통 가능한 언어와 사상과 제도로 재해석하여 현재화하려는 치열한 노력 속에서 탄생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통의 올바른 계승이란 바로 이러한 정신을 우리의 시대에 맞게 창조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4-5쪽)

기독교가 역사적인 종교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가슴에 담아두는 것은 참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종교적 관심, 그것도 다분히 이데올로기적이거나 인간의 욕망에 지극히 충실한 것이라면 그것이 배태할 문제는 그리 간단하게 해결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의 기독교는 그 문제를 심각하게 앓고 있는 듯하다. 기독교가 역사적인 종교라는 것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절대절명의 확고한 권위를 가진 종교가 아니라 인간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좌충우돌하며 지독히도 종교적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 모순을 겪어내고 또 겪어내 왔던 종교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어찌보면 기독교의 역사성은 그 모순의 발견에 가장 큰 의미가 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이 책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그러한 역사적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접하기 위한 디딤돌과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제목에 충실하고자 한 책이다. 교양인들이라는 일반 독자들에게 - 물론 여기에는 기독교인들이 들어갈 것이다 - 역사적 종교로서 기독교가 어떠한 변천과정을 겪어 왔는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되는 성서와 또 다른 한 축으로 볼 수 있는 신조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을 표현해 왔던 절기와 예식, 또한 기독교 공동체의 실체적 모습들을 각각의 주제로 뽑아내어 이에 대한 뿌리 깊은 시대적 배경을 일련의 시간 순으로 이야기한다. 그리하여 성서의 내용을 기초로 삼고, 초대교회와 중세교회를 거쳐 종교개혁가들의 이야기를 중심적으로 들려주면서 현재의 모습에 대한 반성적 검토에까지 이르게 도와준다. 역시 중심은 기독교 자체의 모습이고, 그 중에서도 프로테스탄트의 입장이 대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말하는 것은 여기서 한층 더 나아갈 필요도 있겠다. 교회라는 제도적 실체, 신앙 공동체로서의 실존은 교회 자체의 시대적 변천사 속에서만 존재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교리라는 것은 교회내에서만 치열한 논쟁을 거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긴밀한 영향력 속에서 이루어졌고, 이러한 뿌리깊은 배경은 교회를 교리를 뛰어넘어 서구의 정치, 문화적 형태 자체를 기독교적 양상을 보이도록 만들어 버렸다. 종교가 드러나는 지점, 종교의 역사성은 따라서 보다 포괄적으로 바라봐야 함이 마땅하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기독교의 역사성은 종교 내부를 벗어나 있는 곳을 좀 더 심층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이 책을 비판하기에는 '기독교'에 대한 일련의 시대적 변천사 이해의 필요성이라는 측면을 간과할 수 없을 것 같다. 기독교의 역사성이라는 의미를 보수적, 획일적, 고정적인 전통의 느낌에서 벗어나게 도와주는 것으로도 적극적으로 이 이야기의 의미를 찾아볼 수 있겠다. 그래서 디딤돌이다.




파커 J. 파머, 가르칠 수 있는 용기 : 용기 by 그루터기













  파커 J. 파머 지음, 가르칠 수 있는 용기,  한문화,  2009 (증보판 2쇄)


내가 이 책에서 탐구하려고 하는 영역은 가르치는 자아의 내면 풍경이다. 이 풍경의 지도를 잘 작성하려면 지성, 감성, 영성의 3대 노선을 취해야 하며 그 중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교육을 지성으로 축소해버리면, 그것은 차가운 추상적인 개념이 되고 만다. 반면 감성으로만 다룬다면 나르시스적인 감상주의가 되고 만다. 영성으로만 접근한다면 이 세상과의 연결을 잃어버리게 된다. 따라서 지성, 감성, 영성이 혼연일체가 되어야만 바람직한 전체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이 세 가지는 인간의 자아와 교육에서 가장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나는 지성, 감성, 영성을 이 책속에 긴밀히 엮어 넣으려고 한다. 지성은 가르침과 배움에 대한 우리의 사고방식을 뜻한다. 사람들이 알고 배우는 방법에 대한 개념, 학생과 학과의 본질에 대한 개념의 구체적인 내용과 형태를 뜻한다. 감성은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에서 우리와 학생들이 느끼는 방식을 말한다. 교사와 학생 간의 교감을 증진시키기도 하고 위축시키기도 하는 그런 느낌을 뜻한다. 영성은 삶의 장엄함에 연결되려는 가슴 속 동경이 다양하게 표현되는 방식을 뜻한다. 사랑과 노동을 촉진시키는 동경, 특히 가르침이라는 노동을 촉진시키는 동경을 뜻한다. ... 이러한 영혼의 친교를 위한 내면의 탐구는 동시에 외부적인 관계로 나아가는 탐구가 된다. 우리의 영혼 속에 기거하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자기 집처럼 편한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39-40쪽)

Parker J. Palmer의 번역본 중에서 두 번째로 읽게 된 책이다. 가르침의 행위는 단순히 테크닉이라는 기술적인 차원에 국한될 수 있는 것이 아님에 분명하다. 테크닉이 득세할 때 생겨나는 현상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한다면 가르침의 현장에서 인격이 사라지고 대신 물질이 가득해 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곧, 지식의 거래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지식 거래의 도구로 전락한 가르침은 사람의 내면 깊숙히 파고들지 못한다. 이는 가르침의 현장에서 오고가는 감동이 줄고들고, 그에 따라 마음이 좀처럼 움직여지지 못한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사이의 철저한 분열이 남겨진다. 저자가 주목하는 지점은 따라서 현란한 테크닉이 아니라 테크닉 기저에서 발견해야만 하는 본질, 곧 교사의 내면세계이다. 가르칠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나는 곳은 테크닉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정체성 인식과 자신의 정체성에 성실할 수 있는 마음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면 세계 속에서 자아가 어딘가에 연결되고, 관계되고 있음을 자각하고, 그 상호성, 전체성에 스스로를 온전하게 위치시킬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서 비로소 독단적인 주체가 왜곡시키는 진리의 폭넓음, 속깊음을 겸손하게 발견할 수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가르침의 주제가 품고 있는 신비스러운 비밀이 그 스스로 열려지는 폭을 더 넓게 접할 수 있는 공간을 발견하게 한다는 의미 이겠다. 여기서 독단적 주체를 극복하는 상호성, 전체성의 연결망은 가르침의 현장에서 볼 때는 1차적으로 가르침의 주제를 중심에 두는 것이고, 2차적으로 그것을 둘러싼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그물망과 같은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역설이 설명된다. 주체의 독단성이 사라지나, 오히려 주체는 온전해 진다. 커뮤니티에 속하게 되나 개인이 절대 함몰되지 않는다.

그러나 두렵다. 익숙한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디서나 주체는 독단적이고 싶어한다. 진리의 폭을 제한하여 소유하고자 한다. 그것이 실상은 진리를 고스란히 망가뜨리고 진리와 분열되어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손에 쥐고 있는 듯한 착각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이 손을 놓아버리면 허물어질 것 같고, 불편하며, 무엇보다 이러한 분열이 현실적으로 공고하게 제도화되어 있는 실존의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리어 이상태가 실존의 가장 큰 위협을 겪어내고 있는 상황임은 자각하지 못한다. 그래서 용기가 필요하다. 이를 마주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편안한 분열되신 불편한 온전함을 향해 꿋꿋하게 걸어가겠다는 용기이다. 곧 불편한 온전함에서 다가오는, 이전의 편안한 분열을 상쇄하고 채우고도 넘쳐날 만큼의 보람을 누릴 수 있다는 용기이다. 이렇게 용기를 내고자 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공동체, 커뮤니티를 이루어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꿈은 현실의 다른 말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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