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정말 그 자체로 너무나 큰 은혜다..
삶은 정말 그 자체로 너무나 큰 은혜다..

이주은, 그림에 마음을 놓다, 앨리스, 2008.
우리는 정말로 힘듭니다.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도 힘들고, 강한 사람이 되는 것도 힘들고, 착한 사람으로 사는 것도 힘듭니다. 집으로 운전하며 가다가 눈에 눈물이 가득 차서 시야가 흐려진 적이 있었습니다. 며칠 사이 가슴이 좀 답답한 것 같기는 했지만 그날은 그저 평범하게 지나간 하루였고, 뚜렷하게 서글픈 일도 없었습니다. 무심코 듣던 구슬픈 연주곡에 심취하여 덩달아 심금이 울린 모양입니다. 정말로 사람들 마음 속엔 거문고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삭이면 병이 됩니다. 반드시 언어로 표현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림이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 그림으로 그려진 빨간 사과는 여러 가능성들을 동시에 불러일으킵니다. 그리운 고향의 사과나무를 눈앞에 가져다줄 수도 있고, 빨갛게 달아오른 열정을 떠오르게 할수도 있으니까요. (5-6쪽)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살림살이 방법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이들이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해도 자신의 살림살이 방법은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삶을 모양짓는다. 살면서 부딪히는 여러 일들, 사랑의 문제, 관계의 문제, 자아의 문제 등은 자신의 삶의 모양을 자연스레 드러낸다. 사실 어떤 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삶에 정답이 있다면 이 세상은 너무나 불행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 세상은 어떠한 정답을 만들어 내고 강요하는 듯한 면이 없지 않다. 그래서 불행이라는 단어가 삶을 위협하는 듯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그 허상의 위협이 만들어내는 두려움이 우리의 살림살이를 옥죄어 올 때 이를 자연스레 풀어내지 못하고 그 속에 갇혀버리게 되는 양상은 우리들 몸에, 마음에 실제적인 생채기를 내게 된다. 어쩌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모두들 저마다의 살림살이 방법을 가지고 있기에, 또한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처리 방법을 이미 가지고 있기에 그것을 시시콜콜이 이야기하면 잔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래, 알고 있는 건데 새삼스럽기는.. 하면서 말이다. 그래도 한 번 속는셈 치고 그 이야기 한 번 더 들어봐도 큰 손해는 없을 것 같다. 그림에 문외한인 내가 그저 맘편하게 볼 수 있는 한 길이 되어줬다면, 그림 이야기와 덧붙여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들과 이를 담아내고 있는 문학작품들, 영화이야기들도 함께 즐거이 읽어봤다면.. 그것으로도 이미 나는 마음을 놓은 것이다.

이성전 지음, 서정민, 가미야마 미나코 옮김, 미국선교사와 한국 근대교육,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7.
장로교 선교부의 미션스쿨 폐교에 대한 여러 문제는 역사적으로 어떻게 총괄되는가? 이미 앞 장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제국의 최종전쟁(제2차 세계대전)에 앞서 "신교(信敎)의 자유"를 둘러싸고 미국형 근대와 일본형 근대가 식민지를 무대로 해서 심하게 충돌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 분명하게 선교사는 15년 이후의 [개정사립학교규칙]을 계기로 하여 사립학교에서의 종교교육의 자유를 둘러싼 문제가 3.1운동 후에 사이토 마코토의 등장으로 인하여 양보가 생겼다고 이해하고 있었다. 마치 상극과 융합 사이에서 꼼짝할 수 없는 상태 가운데에 총독부와 미국인 선교사의 공범적 제휴가 가능한 1920년대 양자의 밀월시대가 존재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 장로교 미션스쿨 8개 학교의 지정학교화 정책은 사립학교로서의 종교교육의 자유 획득이라는 점에서, 미션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총독부에 대한 부분적 승리라고 말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지정학교화는 미션스쿨의 더 큰 식민지 교육으로의 편입이라는 총독부 쪽의 부분적 승리이기도 했다. (276쪽) ... 1935년부터 미션스쿨의 신사참배 문제는 (평양과 서울의) 대립구도를 예전보다 더 심각하게 만들어 버렸다. 결과적으로 평양의 "삼숭"은 선교사가 조선인에게 학교명을 양도할 수 있는 기회조차 없이 폐교되고 말았다. 이에 대해 언더우드 등은 조선인들을 위하여 어떤 수단이든 동원하여 서울에 있는 학교의 계속적 운영을 주장하였고 그 결과 경신학교는 조선인의 경영으로 이행될 수 있었다. 이 대립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는 ... 해외 선교에 대한 논쟁으로 발전한 장로교의 내부 본쟁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그것은 '근본주의, 자유주의 논쟁'이라고 불려진다. (280쪽) 압제 하에서 신앙의 자유를 기초로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던 것은 사상과 신조의 자유, 내심의 자유라는 인권적 시각으로 볼 때, 조선의 근현대사 속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교육사의 관점으로 볼 때 ... 장로교 선교부의 철수는 총독부 교육을 상대화시킬 수 있었던 교육 공간의 완전한 소멸에 중대한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조선인의 동화 내지는 황민화를 기도하던 식민지 교육과의 전면적인 통합이라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동시에 미국형 근대가 식민지 조선에서 좌절된 것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다. 이러한 거듭된 구속 상태에서의 왜곡 혹은 굴절현상은 역사적 평가를 내림에 적지않게 곤란함을 느끼게 한다. 전진해도 지옥이요, 물러나도 지옥과도 같은 아포리아(aporia)적인 상태가 바로 당시의 조선 선교부가 경험할 수밖에 없었던 처지였다. (285쪽)
저자가 제기한 문제제기는 다음과 같다. "미국선교사가 조선에서 어떻게 교육에 힘썼는가, 어떻게 미션스쿨을 현지 상황을 감안해가면서 발전시키고 전개해 갔는가? 미국의 교육이 그 모델로 설정되었는데, 그것을 어떻게 선택적으로 현지에 뿌리내릴 수 있었는가? 또 어떻게 그것이 수용되어 갔는가? 이 선교사들이 주도한 미션스쿨을 통해서 심겨진 서양 근대가 일본 제국지배, 혹은 총독부가 추진한 교육과 일본 통치하에서 어떠한 관계성을 갖게 되었는가?"(21쪽) 이러한 문제제기를 통해서 밝혀지는 역사를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한국근대사 안에서 발견되는 미국형 근대의 부식, 수용, 발전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서 근대 한국의 다양성을 뚜렷이 드러내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22쪽) 이러한 역사 이해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근대 한국의 교육은 조선 정부에 의해서 주도되지 못했고, 일제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되면서 교육 제도가 갖추어지기 이전부터 이미 개신교 선교에 의해 기초가 닦였지고 있었다. 초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학교들의 거의 대부분이 개신교 선교 사업의 일환으로 전국 각지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교회, 병원, 학교라는 저자의 표현으로 말하면 "트리니티" 선교사업의 결과였다. 이런 상황에서 일제가 조선을 병합하고 식민통치를 해 나가는 과정에서 교육에 있어서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다름아닌 선교사들의 활동임이 분명했다. 시기적으로 세분화하면 교육정책의 강약의 차이가 있겠지만 일제통치 후기로 가면서 "신도"의 강요로 인한 대립양상이 격해지게 되었는데, 이 양상은 "종교와 종교의 갈등"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일제도, 선교사도 서로를 더이상 용인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이 속에서 선교사들이 일제와 맺게되는 관계의 다양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을 저자는 "평양과 서울의 갈등"으로 정리하여 말하고 있다. 이러한 갈등 양상을 저자는 세계교회사 맥락으로 이어가서 해석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의 갈등"의 맥락이다. 그러나 보다 폭넓게 본다면 이러한 갈등 양상도 결국은 저자의 견해를 빌어 이야기 한다면 미국형 근대의 추진과정에서 나타난 입장의 차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평양이든 서울이든 개신교 선교사업의 한 축이었던 교육사업은 일제와의 대결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미국형 근대가 자리잡을 수 없었던 한국의 구조적인 한계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한계 속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역사의 굴절과 왜곡현상을 지적했다. 신앙의 자유를 지켜내며 기독교 신앙을 유지했고 또한 인권적인 측면에서도 저항의 역사를 남긴 긍정성을 말하면서 동시에 교육에 있어서 총독부 교육을 상대화시킬 수 있는 교육공간의 완전한 소멸과 함께 식민지 교육과의 전면적 통합이라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는 부정성을 동시에 지적한 것이다. 저자의 말 그대로 "전진해도 지옥이요, 물로나도 지옥과도 같은 아포리아적인 상태"였다.
이 연구와 함께 안종철의 "미국북장로교 선교사들의 활동과 한미관계" 를 읽으면 당시대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될 듯하다. 후자의 연구는 자세하고 세심하며 보편적인 역사실증을 통해 구체적인 역사현장을 재현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말미에 이런 추기(追記)를 달았다. "앞으로의 연구에서는 근대 조선에서의 미션스쿨이 조선인들에게 어떤 교육공간이었는지, 또는 식민지 하에서 일본의 제국 지배를 상대화하는 공간으로서 어떻게 기능할 수 있었는지를 규명하는 것이 필요하다"(291쪽). 이 부분에 있어 또 다른 연구가 나온다면 보다 당시대를 살아간 한국인들의 삶을 읽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제국주의 국가였던 미국과 일본, 그리고 그 제국주의 국가의 영향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야 했던 한국, 한국인들의 수동적이고 때로는 주체적이었던 근대화의 노정을 기독교와의 연결 속에서 읽어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안종철,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의 활동과 한미관계 1931~1948,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8.
전체적으로 이 논문은 1930-40년대의 북장로교 선교사들의 존재양태와 활동을 한미관계라는 정치적 맥락 속에서 분석하는 것을 주요 과제로 한다. ... 일제말 전시체제기에 대한 연구는 최근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신사참배 문제와 선교사계 학교들의 관계에 대한 연구도 사정은 비슷하였다. 이 문제에 대한 기존 연구는 신사참배문제로 갈등을 겪었던 개신교계의 종교적, 민족주의적 저항을 주로 규명해왔다. 이런 연구들을 통해 일제의 의도와 조선인들의 저항의 양상과 논리를 상당히 해명되었다. 그러나 학교교육으로부터 철수 또는 잔류라는 형태로 나타난 선교사들의 복잡한 입장은 세밀하게 분석되지 않았다. 특히 교육기관에서 철수문제를 두고 조선 선교사회(Chosen Mission)와 북장로교 해외선교부(Foreign Mission Board)사이에 벌어진 복잡한 관계에 대한 분석은 거의 없다. 이 논문을 통해 선교사회와 해외선교부의 교육철수에 대한 입장 차이가 각 학교별로 어떻게 나타났고 선교사들의 입장 차이가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규명하고자 한다. ... 선교사들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입장차이로 상당한 갈등을 겪었다. 이들은 중일전쟁 후 일제의 반 영미정책 때문에 태평양 전쟁 발발전 차례차례 조선을 떠났다. 남아있던 사람들과 떠나간 사람들 사이에는 상당한 긴장이 있었고 잔류를 결정했던 선교사들도 전쟁발발 후 억류되어 있다가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 선교사들과 선교사 관련 인사들은 미국에 돌아간 뒤 미국의 대일전 수행에 다양한 방법으로 참여했다. 이들의 대일전 수행과 전후 활동은 이 논문의 중요한 분석 대상 중 하나이다. ... 미국 선교사들은 항상 한국인들과 접촉하면서 한국사회의 변화를 체험한 몇 안 되는 외국인들이었다. 그들은 한국사회를 일본 이외의국제 사회와 연결해 주는 주요한 통로 중 하나였고, 미일관계의 변화에 따라 그들의 지위가 규정되는 존재였다. 그들의 존재형태와 활동은 그들의 한국 거주 이유인 선교사업을 통한 조선인들과의 교섭 이외에 다양한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의 내한 선교사들은 미국 대한정책의 측면에서 본다면 식민지 시기와 해방 이후를 연결하는 매개 고리의 역할을 하였다. 그런 면에서 그들의 인식과 활동에 대한 분석은 기독교사 연구와 함께 미국의 대한정책사 연구에도 일조할 수 있다. 본고는 이 시기 내한 선교사들의 활동을 매개로 미일관계의 변화, 미국 대한정책의 구체적 전개양상도 아울러 살펴보고자 한다. - 문제제기와 연구현황 중에서 -
선교사들에 대한 연구가 보다 복합적인 측면을 살펴보는 것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읽게 된다. 그런면에서 류대영 교수의 선교사 관련 연구는 선교사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논문도 일정부분 그러한 연구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이 논문에서 세심하게 나누어 살펴봐야할 대상은 대략 이렇게 나눌 수 있겠다. 조선장로회 총회, 북장로교 조선선교사회, 북장로교 해외선교부, 미 국무부 극동국, 서울 총영사관, 조선인들 등이다. 북장로교 조선선교사회 내에서 달라지는 여러 다양한 입장의 차이는 보다 세부적으로 나눌 수 있는 항목일 것이다. 선교사들에 대한 이해의 폭이 그들이 당면한 역사적 컨텍스트를 통해 넓혀지게 된 것은 긍정적이다. 한국기독교 역사에서 선교사들에 대한 상징적 이해, 곧 기독교 신앙의 전파자라는 단면적인 이해를 확대시겨주기 때문이다. 그런면에서 역사는 사실을 최대한 드러내는 실제적인 실증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최우선이라 볼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 이 논문을 통해서 논문에 사용된 사료들을 주의깊게 살펴본 것은 큰 소득이었다. 선교사 관련 문서들의 활용이 단순히 교회사적 측면에서 뿐 아니라 정치적, 외교적 자료로서도 중요하게 읽혀질 수 있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한국의 근대는 기독교와 복합적인 이해를 꾀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사 연구가 일반 역사에 주는 중요한 의미이다. 개인적으로 더 생각하게 된 것은 교회사의 측면에서 본다면 어떻게 볼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였다. 여기서 교회사의 역할이 드러날 것이다. 무턱대고 중요한 의미를 부각시키는 것 말고, 일반 역사와의 접점에서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해석을 할 수 있고 또한 충분히 일반 역사와도 대화할 수 있는 의미를 제공해야 하는 이중적 과제가 놓여있는 듯하다. (아래는 결론부분을 정리한 것이다.)
대체로 각 교파 해외선교부와 미 국무부 극동국의 정치 불개입 정책은 1941년 태평양 발발 전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1931년 '만주침략' 이후에는 일제가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학교에도 신사참배를 강요함으로써 선교사들과 일제 당국 사이에 긴장이 조성되었다. 일제는 조선인들에게 군국주의를 지탱하는 사상적 동력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그러나 1930년대 초 선교사들과 총독부 측의 타협에서 보듯이 총독부의 고위 관료가 군부 측의 신사참배 강요라는 강경한 입장을 어느정도 제어할 수 있었다. 1930년대 중반 일본 내에서 군부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일제는 중국에서 전쟁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일제는 자신들의 지배권 내에서 '황민화' 정책을 위해 신사참배를 모든 학교에서 강요했다. 선교사들이 운영했던 개신교계 사립학교는 신사참배 강요의 직접적 대상이 되었다. 이에 조선 선교사회는 교육사업에서의 철수를 결정했다. 상당수의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종교 양심상 신사참배를 거부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신사참배 때문에 선교사회가 교육기관에서 철수한다는 것은 다른 문제로 인식했다. 이와 함께 수많은 조선인들이 중등 및 고등교육기관의 확대를 요구하고 있었는데 이는 조선인들이 선교사계 학교를 인수하려는 운동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교사들의 교육사업에서의 철수와 학교폐쇄라는 입장은 조선인들과 심각한 갈등을 초래했다. 한편 선교사들 내의 갈등은 교육사업으로부터 철수를 반대하는 교육선교사들과 찬성하는 선교사들 간의 입장 차이로 나타났다. 후자는 주로 전도사업에 종사하는 인물들이었다.
대체로 외교관들은 종교문제에 국무부가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하면서 신사참배의 종교성에 대한 판단을 보류했다. 그러나 이들은 선교사들이 가능하면 일제 측과 타협하면서 학교를 경영하기를 원했으므로 서북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 선교사회의 입장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조선 내 교육선교사들, 일본 내 미국선교사들은 사실상 미 외교관들의 입장에 동조했다. 이는 미국인들 내의 신사참배문제에 대한 다양한 입장 차이가 전후 아시아 문제에 대한 그들의 입장에 반영되었을 것을 암시한다. 선교사들의 교육철수 결정에 대해 조선인들은 학교가 일제 당국에 의해 그대로 폐쇄되는 것을 우려했다. 그리하여 각 지역별로 인수위원회를 구성해서 선교사회를 통해 해외선교부가 교육기관을 자신들에게 넘길 것을 요청했다.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조선인들을 전시 체제 하에 통제하고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서 조선인들의 교육기관 운영에 대한 열망을 부분적으로 충족시키고자 했다. 그러므로 일제 측은 조선인들의 교육기관 인수경영 안을 지지했다. 조선인들의 교육열, 일제의 반선교사 정책과 전시 조선인 동원에 대한 정책, 교육선교사들의 조선인들의 인수경영 안에 대한 지원 등이 이 시기 학교 운영문제에서 매우 복잡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었다. 이 점은 신사참배 문제가 단순히 일제와 조선인들 간의 갈등을 넘어서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해외선교부는 조선 거주 선교사들을 직접 불러서 의견을 들으면서 언더우드 등이 주장하는 교육인수 안을 지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해외선교부의 입장은 조선거주 선교사들 다수의 반대에 직면하여 평양의 학교폐쇄 문제를 제외하고는 일부 수정된 형태로 나타났다. 해외선교부와 조선 선교사회는 교육기관 철수안을 두고 상당한 갈등을 겪었다. 결국 신사참배문제를 겪으면서 '소수파'가 북장로교 조선 선교사회를 주도하게 되었다.
1940년 무렵 동아시아에 전운이 드리워지자 미국 선교사들은 더 이상 선교활동을 지속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때 국무부는 자국민들의 철수를 '권고'했으므로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1940년 11월에서 이듬해 초에 걸쳐 한반도를 떠났다. 일부 선교사들은 반영, 반미 정책 때문에 일제에 의해 '추방'되었다. 결국 교육기관 운영에 참여한 선교사들이 중심이 된 잔류파 선교사들과 미국으로 떠나가는 선교사들은 서로를 비판적으로 인식했다. 남아있던 선교사들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후인 1942년 6월초에야 적성국 국민 교환이라는 명목으로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국무부는 미국으로 돌아오는 선교사들에게 한인들의 일제에 대한 저항, 독립운동의 가능성 등에 대한 정보를 요구했다. 이에 귀국하는 선교사들은 귀국하는 함상에서 한반도에 대한 정보를 미 정부에 제출했다. 이들 정보는 국무부의 임정불승인과 신탁통치안을 바꾸기에는 역부적이었다. 귀국후에도 일부 선교사들은 전쟁이 종결될 때까지 정보당국과 적극적으로 협력하게 되었다. 선교사들의 미 정보당국과의 협력 관계는 이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식민지하에서 견지해온 철저한 '정교분리'를 넘어서 '기독교'와 미국의 '민주주의'의 확산을 동일시하게 만들었다. 이는 선교사들의 해방 후 미군정과의 협력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언어우드의 경우에서 보듯이 이들은 미 군정청에서 활동하면서 동시에 개신교 선교사들의 입국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활동을 했다. 그러한 선발진의 노력의 결과 1948년 초 각 교파 조선 선교사회는 다시 구성되었다. 한편 식민지하에서 활동했던 선교사 1, 2세들의 자녀들은 미군정과 함께 한국문제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게 되었다. 미군정에 참여했던 선교사 관련 인사들 중 일부는 일찍부터 '소련의 영향' 하에서 북한에서 진행되는 사회개혁을 강력히 비판하면서 남한 단정 안을 지지했다. H. H. 언더우드 부자는 그 대표적인 경우일 것이다. 이와 달리 일부 젊은 '자유주의자'들은 한국인들의 열망을 한층 섬세하게 인식하면서 미군정이 직면한 문제를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닌 사회경제적 문제로 인식했다. 그리하여 한국의 토지개혁 등 사회개혁과 미국의 남한에 대한 포괄적인 원조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여기에는 번스와 맥큔 등이 해당될 것이다. 민주주의 외양만을 갖춘 미군정과 이후의 남한정부가 선교사관련 인사들 중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을 수용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들 '자유주의자들'이 볼 때 남한의 민주주의는 '반공적 민주주의'와 '절차적 민주주의'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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