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스토. L. 곤잘레스, 기독교사상사 : 신앙과 삶.. by 그루터기








   유스토. L. 곤잘레스,  이후정 옮김,  그 세가지 신학의 유형으로 살펴본 기독교사상사,  컨콜디아사, 1991
   


매번 이렇게 다시 읽기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것임에는 분명하다. 가장 큰 것은 되씹고 되뱉아보는 과정에 대한 껄끄러움이라고 할까. 껄끄럽다라는 것은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뭔가 대단하게 혹은 뭔가 있어 보이게 정리해 낼 수 없는 여전히 얄팍한 내공의 수준이 이런 류의 글을 적게 하는 데에 가져오는 팍팍한 느낌이 그 첫째가 될 수 있겠고, 다른 한 편으로는 감정적 영향이 더욱 크게 자리해서 굳이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것이 편하게 느껴지는 심리적 상태를 만들어 버리는 마음 자세가 그 둘째가 되겠다. 어찌되었든 껄끄럽다. 그럼에도 무언가 써야할 것만 같은 느낌이 떠나지 않는 걸 보면 그 껄끄러움을 없애버리는 것이 더 나을 수도..

곤잘레스는 신학의 유형을 A, B, C의 3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이 유형은 고전적인 정형으로서 2세기 말에서 3세기 초경에 형성되었다. 지금도 유효한 이 유형들은 무려 1700년 전에 발생했던 것들인 것이다. 곤잘레스는 이 유형을 지역과 인물, 하나님 이해, 창조와 원죄 및 구원의 길, 성경의 사용, 관점의 문제 등을 기준하여 나누어 본다. 이를 세분화하여 설명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설명은 곤잘레스가 도표로 정리해 놓은 것을 내가 이해한 바를 중심으로 적어놓은 것이다.)

유형 A는 카르타고의 터툴리안이 중심이 되는 신학 유형이다. A 유형에서의 주요 관심은 도덕에 있으며 따라서 법이 주요 범주로 자리잡는다. 이는 스토아 철학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 선구자로는 로마의 클레멘트, 헤르마스, 제2클레멘트 등이 있다. 이 유형에서 하나님은 법수여자이며 재판관으로 고백되고, 하나님의 창조는 완전하고 완료된 질서로서 이해된다.(하나님의 창조가 완전하고 완료된 질서라는 것은 그것이 곧 하나님의 최종적 목표였고, 그 후에 일어난 모든 일은 죄에서 기인한 것으로 역사는 죄의 결과이기에 하나님의 원래 목적은 역사의 실존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뜻을 함축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최초의 창조 상태, 완전한 상태에로 복귀하는 것에 큰 관심을 두게 된다.) 여기서 죄는 율법을 어기는 것, 곧 법수여자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다. 이 죄는 유전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따라서 인간이 빠지게 된 곤궁은 죄의 문제, 법적인 빚, 도덕적인 빚의 문제였다. 용서를 받기 위해서 인간은 회개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조차도 명령이다. 또한 빚에서 파생되는 것으로써 빚을 갚아야할 수단, 곧 죄인은 하나님께 빚을 지고 있기에 하나님께 보상(satisfaction)을 해야 한다는 개념이 생겼다. 터툴리안에게 있어서 예수는 새로운 모세이며 복음은 새로운 율법과 같다. 예수의 주된 목적은 우리에게 회개의 법을 주려는 것이다. 성례전은 씻음의 의미가 강했다. A 유형에서 추구하는 최종적인 완성은 법과 질서의 나라이며, 성경은 도덕적 법전으로서 해석되는 경향이 짙다.

유형 B는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이 중심이 되는 신학 유형이다. B 유형에서의 주요 관심은 형이상학에 있으며 따라서 A 유형에서와른 달리 진리가 주요 점주에 자리잡게 된다. 이는 플라톤적 철학의 영향을 받았으며, 선구자로는 필로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등이 있다. 이 유형에서 하나님은 말할 수 없는 일자, 초월자로 고백되고 하나님의 창조는 원래 영적이 되도록 의도하신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물질적인 존재, 곧 피조물의 죄의 결과로 이중적인 창조가 이루어지게 된 것으로 본다. 여기서 죄는 말할 수 없는 일자를 명상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원죄와 연관된다. 따라서 인간이 빠지게 된 곤궁은 하나님을 명상하지 못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지 못하는 것에 있다. 높은 곳에서 오는 조명의 결여이다. 그리스도의 사업은 이 조명과 연관된다. 예수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조명을 전달하는 것으로서 하나의 본이며, 가르침이 되는 것이다. 성례전도 마찬가지로서 조명과 연관되어 이를 상기시키는 하나의 상징과 같은 것으로 이해된다. B 유형에서 추구하는 최종적인 완성은 명상에로의 복귀이며, 성경은 알레고리적으로 해석된다. 

유형 C는 소아시아와 시리아 지역의 이레니우스가 중심이 되는 신학 유형이다. C 유형에서의 주요 관심은 목회에 있으며 주요 관심은 역사에 있다. 여기에 끼친 철학적 영향은 특정한 것이 따로 없고, 선구자로서는 이그나티우스와 폴리캅, 데오빌로 등이 있다. 이 유형에서 하나님은 목자이며 아버지로 고백되고, 하나님의 창조는 시작으로 이해된다. 하나님의 목적은 인간 피조물이 성장하여 계속 증가하는 신성과의 교제를 향유하는 것, 인간과 하나님이 더 가까운 교통에로 성장하고 발전하는 과정에 있다. 여기서 죄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 하나님의 질서를 앞지르는 불순종에 있다. (이는 인간의 교만함, 자아 중심성, 스스로를 신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은혜를 앞지르는 행위라고 볼 수 있게다.) 원죄는 인간의 유대성으로 인해 하나가 모두에 대해 범죄한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인간이 빠지는 곤궁은 죄에의 종속이다. 죄에 의해 뒤틀려진 인간의 역사인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이러한 종속에서 해방을 가져오는 존재이다. 새 인간의 시작이다. 우리를 새 창조의 몸의 지체로 하여 새 머리에 연합시키는 것이다. 성례전도 이와 연관된다. 인간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 만드는 접붙임이며 영양분을 공급해 주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C 유형에서 추구하는 최종적인 완성은 자유와 성장의 나라이며, 성경은 유형론적으로 해석된다. 

이것이 곤잘레스가 설명하는 세 가지 유형의 신학이다. 곤잘레스는 이어서 이러한 유형들이 콘스탄틴 이후의 시대, 곧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로 자리잡게 되면서 어떻게 경과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이 때 전면으로 등장한 것이 A 유형의 신학이다. 특히 다수의 유형 B의 요소들을 유형 A의 본질적인 것에로 병합시킨 정통주의를 발전시켰다. 이 과정에서 탁월한 역할을 한 이는 어거스틴이었다고 곤잘레스는 평가한다. 어거스틴은 후기 교부신학자이면서 중세를 연 인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중세는 오직 유형 A 신학 만이 정통이며 유형 A 신학이야말로 기독교 교사들이 교회의 시초로부터 견지해 온 바였다고 곤잘레스는 평가한다. 이를 증명하는 것은 중세의 신학과 경건의 발전에 중심적이었던 두 가지의 주제, 참회제도와 죄의 보상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개념이다.
유형 A가 유형 B를 병합하면서 전면으로 등장한 것에 곤잘레스는 기독교가 궁극적으로는 희랍철학과 조화되며, 로마 법과 질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조화될 수 있다는 변증론적 성격을 큰 이유로 설명한다. 정치적 및 사회적 관점들과 이해들이 철학적 및 신학적 교리의 옷과 조화될 수 있는 접점이 크게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반대로 유형 C가 처음 수 세기 이후에 일반적으로 잊혀졌던 이유는 단순히 교리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및 정치적 의미로도 살펴볼 수 있다. 곤잘레스는 그것이 복음을 확립된 기존 질서에 더 잘 받아들여질 수 있게 만들고자 했던 교회와 사회에 방해가 되기에 충분했으며, 기존 질서를 복음에 더 받아들여지게 하는 것에도 역시 방해가 되기에 충분했다는 점에서 찾았다. 유형 A가 그레코-로만 사회에 적합한 길을 법과 질서에서, 유형 B가 철학에서 찾으며 권세있고 지식있는 엘리트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과 달리 유형 C는 종말론적 기대, 곧 지상에서의 평화와 사랑 및 정의를 포함하는 기대를 품고 있었기에 권세잡은 자들로부터 호의를 얻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종교개혁과 그 이후의 시대에는 여전히 유형 A의 신학적 틀 내에서 이해할 수 있지만 이전과는 달리 유형 C의 신학적 관심이 다시 등장하기 시작한 시대로 곤잘레스는 설명한다. 이 때 루터는 칭의에 대한 우선적인 강조와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가 함축하는 것의 의미, 성장에 관한 상대적 무관심, 정치적 세계의 역사적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취급하지 못하는 약점을 갖고 있지만 다른 주요 개혁자들에 비해 유형 C의 신학을 상당 부분 회복시킨 개혁자로 평가된다. 후대의 세대들은 루터가 재발견했던 많은 요소들을 상실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곤잘레스는 칼빈파, 루터파의 정통주의는 개신교의 주제들을 유형 A의 도식 내에 재위치시켰다고 비판한다. (그가 사용한 "프로테스탄트 스콜라주의"는 인상깊은 표현이었다.) 그리고 곤잘레스는 이 후의 정통주의에 반하여 일어났던 경건주의, 합리주의, 그리고 19세기에 주된 관심이 되었던 역사의 개념에서 비롯한 자유주의, 그리고 자유주의에 반응하여 일어난 근본주의 모두 유형 B와 유형 A의 연속이었다고 발한다. 그러나 곤잘레스는 무엇보다도 이 과정에서 유형 C의 관점과 통찰들이 재발견된 것이 가장 중대한 특징으로 평가한다. 

다수의 환경들을 통해 20세기는 유형 C 신학의 중대한 회복에 이르렀다고 곤잘레스는 말한다. 칼 바르트는 이를 이끈 대표적 신학자이다. 바르트의 영향을 통한 개혁신학의 갱신, 룬트파 신학이 대표하는 루터교내의 새 조류들, 예배(전례)적 갱신, 제2바티칸 공의회 및 해방 신학 등과 같은 서로 다른 현상들 속에서 곤잘레스는 이를 설명하고 있다. 인간역사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들을 바라보며 그 목적에 참여하는 인간의 모습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곤잘레스는 바로 이 유형 C의 신학이 충분히 더 재발견하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유형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유형화 시킬 수 있는 명확한 구분들, 관점,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충분한 자료들의 섭렵(사상을 총체적으로 훝어보았다는 것을 의미하겠다.)을 필요로 한다. 공부를 하는 나에게 있어서는 갈 길 먼 이야기와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러한 이해는 공부를 하는 내게 하나의 이해의 틀, 이해의 관점을 제공하며 그 길을 수월하게 하는 유용한 도구와 같지 않나 생각해 본다. 곤잘레스가 말하고자 했던 유형 C의 신학은 지금의 내게는 상당한 설득력을 전해 준다. 특히나 이레니우스가 목회적 관심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친밀한 관계를 지향했다는 것은 21세기를 사는 지금의 현실 목회와의 연관성을 가질 수 있는 중요한 접점과도 같다고 생각해 본다. 아무래도 나에게는 삶의 문제, 곧 역사의 문제가 보다 피부에 많이 와 닿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 신앙은 삶과 떨어질 수 없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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