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의 로마서 강해 Note (6) - 1:16~23 by 그루터기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 복음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로마서 1:16)

하나님의 능력이란 하나님께서 본질상 그 자신을 강하게 한 그러한 능력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게서 그것으로 무능한 것을 유능하게 만들고 강하게 만드는 그러한 능력으로 이해할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흔히 "하나님의 은사", "하나님의 피조물",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다음에 주목할 점은 "하나님의 능력"과 "인간의 힘"이 어떻게 구별되느냐하는 점이다. 후자(인간의 힘)는 육에 따르는 건강을 유지하게 하는 체력과 건강인데 그것은 육체를 가지고 할 수 있는 모든 재능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능력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서 완전히 말살시켜버렸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능력을 인간에게 내려주시기 위한 때문인데 그것으로 영혼이 강해지고 구원을 받아 영에 속하는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도 되겠다. 즉,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복음은 성령의 능력, 부귀, 무력, 영예, 영적인 모든 선한 것들과 같은 것들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의 부귀, 무력, 금전, 왕국들은 다 인간의 권력에 속하는 것들인데 인간의 능력으로 실현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인간의 욕정에 관해서 말하는 한 이 모든 것은 완전히 소멸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 안에 거할 수 없다. 왜냐하면 부자나 권력자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 번째로 주목할 점은 참된 신앙이 없는 사람은 복음을 부끄러워할 뿐만 아니라 적어도 마음과 행동으로 복음을 배반하는 사람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육에 관한 것과 이 세상에 속한 것에서 만족을 찾고 향락을 찾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에 속한 것들을 맛보고 즐기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설교자가 청중의 권위나 그 배후 세력이나 숫자를 두려워할 때 나타나며 도 설교자가 근본 진리에 대해서 말 못할 때 나타나며 무지하고 비천한 청중이라고 해서 그들의 소리를 무시할 때 더 분명히 나타난다. 또한 이 세상의 왕자나 법률가들은 자신의 권력과 지혜를 가지고 자기네들의 지위를 유지시키려고 주장하는 생활을 할 때에 매우 위험한 경우를 많이 당할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복음 속에 나타납니다. 이 일은 오로지 믿음에 근거하여 일어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 (로마서 1:17)

하나님의 의라고 할 때에 하나님 자신 안에 스스로 의롭게 됨이라고 우리가 이해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 우리가 거룩하게 되다고 이해해야 하겠다. 그것은 복음을 믿는 믿음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의라고 하는 행위에 나타나며 행동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행동에 선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행동은 의에 근거해서 나와야 한다.

하나님을 알 만한 일이 사람에게 환히 드러나 있습니다. (로마서 1:19a
)

이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라고 하겠다. 이것은 하나님의 연약함과 어리석음이 인간의 강함이나 능력이나 지혜보다 더 강하고 더 권위가 있고 더 지혜롭다는 말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나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어리석음과 연약함은 사람이 볼 때에 그렇게 보일지 모르나 이것이 복음에 의해서 생활하는 방법이 된다. 이것은 우리 내적 인간만이 인식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지혜와 능력은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음이 되며 연약함이 되며 더 나아가서는 죽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한 행동으로 진리를 가로막는 사람의 온갖 불경건함과 불의함을 겨냥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납니다. (로마서 1:18)

사도 바울은 그의 공격의 화살을 이 세상의 권력자나 지혜자들에게 돌린다. 그것은 이런 사람들을 먼저 굴복시켜야 그들을 따르는 무식한 사람들도 굴복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대한 설교는 철학자나 권력자들에게는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그들의 사고방식에는 정반대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 (로마서 1:20)

이 세상의 지혜자가 이 세상 창조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고 해도 세상을 창조한 그의 업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불가시적인 본질은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입증하는 역할을 하는 말씀, 즉 성서를 통해서 인식할 수 있다. 좀 더 명백하게 이해하려면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단지 로마 사람들만 책망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다. 바울은 이방 사람이나 로마 사람이나 어떤 개인을 책망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책망한 것이다. 도덕적 규범, 이것으로 바울은 복음의 선교자를 첫째로 곱고 무엇보다 먼저 그들이 백성의 지도자들을 책망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지시해 주었다. 그것은 그들이 그릇된 사고 방식으로 남을 지도한다든지 지나친 열정으로 광신적인 언사를 써서 설복시키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디까지 복음의 말씀으로 설교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환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로마서 1:19b)

사도 바울은 이 귀절로서 자연의 모든 은총의 시혜자인 하나님에게 감사와 영광을 돌릴 것이라고 했다. 바울이 말한 대로 모든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에 대한 명확한 지식이 주어졌다. 분명히 그들은 하나님의 불가시성, 그의 신성, 그의 항시성, 그의 능력을 알고 있다. 우상을 만들어 섬기며 그것을 "신"이나 "하나님"이라 부르는 사람들은 그들 마음 속에 신성을 인식하는 지식이 있다고 말한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전혀 알지 못하면서, 도 어떤 일을 해야 하나님을 기브시게 할지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무슨 형상을 만들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들이 이 불가침의 신성을 예배하지 않고 다만 그들의 욕망과 소원하는 대로 신성을 변질시켜 버렸고 자기네 요구대로 순종케 하려는 것은 큰 잘못이다. 누구나 자기 마음에 맞는 어떤 신성을 찾아 보려고 하는데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변질시키는 일이 되고 만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해드리거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해져서 그들의 지각없는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로마서 1:21)

만일 그들이 그를 하나님으로 존경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섬겼다는 말이 아닐까? 분명히 사도 바울은 그렇다고 말하려고 했으며 다음 귀절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들은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사람이나 새나 네 발 짐승이나 기어다니는 동물의 형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로마서 1:23)

이것은 그들이 그를 하나님으로 예배하지 않고 어떤 비슷한 형상을 만들어 숭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네 마음대로의 상상력에 의해서 가공한 것을 예배하는 것이다. 오늘날에 있어서도(이 말은 루터가 루터 당시의 시대를 말하는 말이다. 그러나 21세기를 사는 지금도 매 한가지겠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예배하지 않고 자기네 마음대로 생각해 만든 어떤 다른 것으로 예배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러므로 멸망의 순서와 단계에 대해서 주목해 보자. 첫번 단계는 망은(忘恩) 혹은 감사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 자기 만족이라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는 그 은혜의 수여자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허영이다. 사람들은 모든 피조물을 자기에게 유익하도록 또 자신의 향락을 위해 사용하려고 한다. 세 번째 단계는 맹목이다. 진리를 상실하고 허영에 빠져 있는 사람은 그 마음과 생각이 완전히 맹목이 되고 만다. 네 번째 단계는 하나님을 반역하는 일이다. 이것은 최악의 경우이다. 자연히 우상숭배로 떨어지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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