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니버, 그리스도와 문화 : 다양성의 존중.. by 그루터기











  리처드 니버, 홍병룡 옮김,  그리스도와 문화,  IVP,  2007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을 말할 수 있을까? 신에 대한 물음은 과연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답과 연결될 수 있는 것일까? 여러 가지 논의가 있을 수 있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어떤 답도 정답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 아닐까싶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을 말할 수 있는 정답을 가지고 있다면 이미 그 순간부터 그 하나님은 하나님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인간의 한계에 갇혀 있는 작고 작은, 어찌 보면 죽은 신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무한한 거리, 결코 범접할 수 없는 거리 앞에서 인간은 좌절할 수밖에 없고 겸손해 지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하나님을 완전히 알 수도 없고, 말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나님을 묻고 하나님을 말하고자 한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을 말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바로 이 경우, 하나님의 말해야 하는 경우조차도 인간이 신에 대한 물음의 해답을 스스로 쟁취한 경우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그렇게 하라고 스스로를 드러내시고 말씀해 주셨기에 가능한 것이라도 봐야 옳지 않을까 싶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래서 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 하나님을 말할 수 있도록, 볼 수 있도록,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신 계시 중 가장 직접적이고 파격적인 계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 곧 성육신의 신비는 인간이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중요한 접촉지점이고, 인간이 하나님을 말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사건이다. 그러나 여전히 갈등은 존재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말 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도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니버는 이렇게 말한다. 

“물론 우리가 언제나 동일한 그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을 정의하려 하거나, 그분에게 다양한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설명하려는 순간 … 특히 두 가지 난점이 우리를 기다린다. 첫째, 인격의 형태로 스스로를 드러낸 한 원리를 어떤 개념들과 명제들로 제대로 기술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점이다. 둘째, 이 인물에 관해 무슨 말을 하든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화자가 속한 교회, 역사, 문화에서 나오는 상대적 관점임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이다.(p.88)”

결국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인간과 같이 되셨다는 것은 이해 불가능한 신비이다. 이는 합리적 언어로 완벽하게 이해 가능하도록 설명할 수 없는 불합리한 세계를 경험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이 이해 불가능한 신비를 사건으로 말하고 있다. 무한이 유한을 만나준 사건으로 기록한다. 이러한 신비적 사건을 설명하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인간이 하나님을 말 할 수 없다는 제한을 재확인 시켜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신비로서 하나님을 고백하게 해준다. 제한된 범위에서 제한된 만큼 하나님을 말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그만큼이라도 인간은 하나님을 가장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제한된다는 것이다. 첫째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여전히 초월자, 절대자 하나님의 은혜를 담고 있는 신비, 인간이 풀어낼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롭고 측량할 수 없는 세계를 보여준다는 것에서 인간의 제한됨을 재확인해야 한다. 둘째로는 이 신비를 대하는 다양한 인간의 모습, 상대적 삶의 정황에서 비롯된 제한된 인간의 현실이다. 가장 놀라운 드러내심의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에서 인간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신 신비의 은혜를 고백했다. 그러나 이것은 저마다의 상대성을 가진다. 즉, 인간의 다양한 삶의 모습, 문화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서로 다른 모습으로 비추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제한됨 속에서도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희망을 발견했다. 가장 파격적인 만남을 통해 제시된 이 희망은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인간의 삶 속에서, 문화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은혜로운 신비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극과 극의 만날 수없는 두 평행선의 차이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극복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초월자 하나님을 말할 수 있게 되었고, 역사적 예수를 통하여 유한한 인간, 인간 세상의 문화를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문화의 관계는 복잡하다. 하나님과 인간을 함께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와 문화의 관계는 단 하나의 가치, 하나의 관점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완벽하게 이해 가능한 합리적 설명이 아닌 신비라는 측면에서 하나의 모습으로 고정지어질 수 있는 것이 될 수 없다. 또한 신비를 받아들이고 고백하는 인간 저마다의 다양한 삶의 현실 때문에서도 그렇게 볼 수 없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기본적인 차이, 평행선 같은 질적 차이로 인해서도 둘의 관계는 쉽게 만날 수도, 쉽게 하나가 될 수도 없는 상황으로 단순하게 볼 수 없다. 니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 연구를 아무리 연장하고 정교하게 만들지라도 “이것이 바로 틀림없는 정답이다”라는 결론에는 도달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 지금쯤에는 양자 모두에게 이 유형들이 서로 완전히 배타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점과, 이 다양한 입장의 여러 지점에서 서로 화해하는 게 가능하다는 점이 확실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다른 학문 분야에서처럼 신학에서도 더 포괄적인 이론을 정립하는 일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점도 분명해졌을 것이다.(p.363)”

따라서 인간의 제한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한을 개방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하면 앞서 말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신비를 다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제한, 또한 이 신비마저도 저마다의 현실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이는 인간의 현실을 보다 긍정하는 것이다. 저마다의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고백하는 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제한된 것이며 또 다른 모습의 고백도 가능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 여기에서 기인하는 다양한 신앙의 유형의 저마다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서로 다른 유형, 서로 다른 삶의 모습이 서로에게 균형을 잡아주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결국 서로의 다양한 삶의 모습, 삶의 한 복판에서 일어나는 신앙의 결단을 존중하는 데에 이르러야 한다. 니버가 결론부분에 제시한 다음과 같은 말은 그래서 의미 있다.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믿는 그 대상 및 그 대상을 믿는 모든 이와 하나가 되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즉 우리가 믿기 때문에 우리의 상대성과 우리의 관계성을 인식하게 된다. 믿음이 있기에 우리는 의존관계의 맥락에서 우리의 실존적 자유를 인지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제로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믿음으로 결정한다는 것은 이 맥락을 의식하는 가운데 결단하는 것이다. … 이런 결단은 상대성을 지닌 통찰과 신앙에 기초한 것 같지만, 상대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결정이지만 개인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유로운 결정이지만 개인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유로운 결정이지만 독자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순식간에 내려지지만 역사와 상관없는 것은 아니다.(pp. 365-366)”


믿음으로 결단한다는 것은 결국은 인간의 제한된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인간의 제한된 현실, 신비를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고, 저마다의 현실에서 다르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 가운데 일어나는 것이다. 이 현실을 직시한다면 인간은 자신의 믿음만을 절대화 할 수 없다. 오히려 이 현실을 직시하고 겸손하게 자신의 제한된 믿음의 결단을 부족한 것으로 고백한다면 다른 믿음의 결단을 통해 균형 잡힐 수 있고 풍부한 신앙의 세계를 누릴 수 있는 여지가 확대 되게 된다. 여기서 창조사역과 구속 사역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그 큰 은혜, 절대적인 사랑의 손길에 의해 보완되고 교정되고 용서받고 더욱 풍성해지는 신앙이 생겨날 수 있다. 그래서 상대적인 것 같지만 상대적인 것이 될 수 없다.

또한 개인적인 결정이지만 개인주의적인 것이 될 수도 없다. 믿음의 결단은 실존적 결단이다. 인간의 제한된 현실 속에서, 삶의 정황 속에서 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존은 독단적일 수 없다. 관계가 빠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관계는 지금 이 순간 믿음의 결단을 내리는 주변과의 관계가 될 수도 있지만, 역사라는 시간적 개념과도 연결될 수 있다. 결정을 내리는 순간은 기억과 기대로 차 있다. 현재의 의미는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기대로 더욱 풍성해 질 수 있다. 그와 더불어 누군가가 함께 한다. 따라서 믿음의 결단은 개인주의적일 수도, 독자적인 것일 수도, 역사와 상관없는 것일 수가 없다. 인간의 실존적 성격은 다름 아닌 인간의 제한,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라는 관계를 인정하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신앙의 다양한 유형들을 받아들일 수 있고, 이 유형들을 통해 균형을 꾀하여 보다 풍부하고 깊이 있는 신앙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여지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의 신앙 고백을 확대, 재생산하여 그 외의 신앙 유형을 인정하지도 바라보지도 않는 것 같다. 신앙의 깊이가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풍부함이 넘쳐나는 것이 아니라 고립되는 듯하다. 그래서 세상과 고립되고 문화와도 고립된다. 그렇게 당당하게 외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 고립 속에서 무시되는 경향도 짙다. 어느 순간 기독교는 ‘개독교’로 바꾸어 불리기 시작했고, 오만함의 대명사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개혁의 외침은 사람들의 무시로 되돌아온다. 그래도 스스로는 구별되었다고, 성별되었다는 생각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음을 감사히 여기는 자기만족의 세상으로 빠져드는 것 같다. 마치 성서 이야기에서 한 바리새인이 자신은 가난한 여인과 같지 않음을 보고 감사히 여기는 상황을 보는 듯하다.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인간의 제한됨, 자기 스스로의 제한된 현실을 더 이상 심각하게 여기지 않아서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래서 다양한 삶의 모습에서 비롯되는 신앙 고백의 역동성을 인식하지 못하게 되고, 더 나아가 저마다의 실존적 상황에서 비롯되는 믿음의 결단이 존중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결국은 어느 순간 은혜의 감격 속에서 죄된 인간성 앞에 좌절하며 울던 그 상황이 더 이상의 의미를 주지 못하는 상황, 더 깊은 차원의 겸손에 이르지 못하는 상황에서 교만을 낳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신앙이 인간에게 주는 확신은 그래서 무서운 것이라 생각된다. 확신을 통해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고 더 이상의 반성의 여지, 성찰의 여지가 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신앙의 확신은 더욱 배타적인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의 유혹이 아닐까. 아담과 하와와 뱀의 유혹에 빠져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꼬임에 넘어가는 것처럼 말이다. 어느 누구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더욱 주변을 봐야 하겠다. 다양한 형태의 삶의 유형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이로써 자신의 끊임없이 비추어보는 작업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자신의 결단만큼 다른 이의 결단을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는 겸손함을 견지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완벽한 것은 없다. 그렇다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부족하다는 것, 제한된다는 것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결국 그 시작은 인간됨을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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