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비 콕스, 세속도시 : 인간에 대한 신뢰와 불신 사이에서.. by 그루터기










  하비 콕스 지음, 구덕관 외 옮김,  세속도시, 대한기독교서회,  2007(신판 11쇄)
  

하비 콕스의 『세속도시』는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의 "테겔신학(Tegel Theology)"에 대한 응답으로 볼 수 있다. 테겔신학은 본회퍼가 반 나치운동으로 테겔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죽기직전까지 섰던 편지글 녹아있는 신학을 말한다. 여기서 본회퍼가 던진 질문은 이것이었다. 콕스의 인용을 재인용한다.

우리는 전혀 종교가 없는 시대를 향해 나가고 있다. 우리가 어떻게 종교 없이 신에 대하여 말하겠으며 어떻게 세속적인 형식으로 신에 대하여 말하겠는가(p. 283)

기독교 왕국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면서, 더 이상 하나님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세속화 시대에 과연 하나님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를 본회퍼가 던진 것이었다. 

당시 미국은 세속화의 전형적인 양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미국은 식민지에서 출발하여 수많은 이민자들로 인해 다민족, 다인종, 다종교 국가를 이루었다. 특히 식민지에서 독립 국가를 건립하면서 미국은 독립선언서와 헌법에 기초한 민주 공화국을 수립했다. 이것은 국가와 종교가 일치되어서 단 하나의 종교가 지배하였던 근대 이전의 사회-종교체계와의 결별, 다른 말로 국가와 종교가 공식적으로 분리된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의미한 것이었다. 이 후 산업화가 일어났고 이는 도시화와 연결되었다. 연스럽게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체제가 굳건하게 형성되어갔다. 종교가 정치와 분리되고, 다종교적 상황을 넘어 이제 종교는 완전하게 하나의 종교시장을 형성하게 되었다. 소비자에게 종교상품을 팔아 자신을 유지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근대성의 도전은 상황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다. 다윈의 자연선택론과 성서 연구에 있어서 근대고등비평의 등장이 기독교에 끼쳤던 영향은 상당했다. 성서의 절대적 권위가 흔들렸기 때문이었다.

이런 시대적 흐름 속에서 본회퍼가 던진 질문은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당연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한 세대가 지나서야 이에 대한 응답이 시도되었다. 바로 하비 콕스의 『세속도시』가 그에 대한 설득력 있는 응답으로 제시된 것이다. 하비 콕스가 이름 있는 신학자로 부상한 것이 바로 여기에서 연유했다. 한 세대동안의 신학적 과제를 해결하는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콕스는 세속화에 대해 긍정적 답을 내어놓았다. 콕스는 세속화는 곧 성서적인 변화라고 긍정함으로써 무작정 부정하고 거부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수용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종교와의 연관성을 계속해서 주장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교에서부터 모든 것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말하고, 성숙한 인간으로서, 해방된 인간으로서 새로운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콕스의 주장은 역사적 맥락에서 종교가 없는 시대, 곧 세속화 시대의 하나님 질문에 대한 신학적 대답으로서의 의미를 가진 것이다.

콕스는 더 이상 기독교 왕국 시대의 잔재에 연연하지 말 것을 말하고 있다. 기독교왕국 의 잔재는 마을 시대를 벗어나 도시 시대를 사는 지금에는 어울리지 않는 옷과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왕국이 확고하게 구축한 형이상학적인 하나님에게서 더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말 것을 말한다. 대신 도시 시대, 세속화된 시대에서 하나님을 말하기 위해 형이상학적 최고의 존재와 구별되는 하나님의 감추임을 말한다. 형이상학적 개념의 틀 안에 갇힌 하나님, 인간의 손 안에 가두어 놓는 하나님에서, 삶으로 마주하는 하나님을 만나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 상호간의 관심과 인간의 책임을 회복시켜 주는 관계 속의 하나님을 말한다. 이 하나님은 언제나 생각해 낼 수 있고, 그려낼 수 있는 관념적인 하나님과는 다르다. 절대적인 타자(他者)의 입장에서 인간을 대하는 하나님이고, 나타나지 않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이 하나님을 만나는 곳은 인간이 기대할 수 없는 곳, 아무리 인간을 높이 연장시키고 확대시켜도 체험할 수 없는 그런 세계에서나 가능하다. 그래서 콕스는 “인간의 역경과 부자유 속에서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는 삶의 극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만난다고 말한다. 이 하나님을 만나기까지 인간은 성숙하고 책임 있는 존재로서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 비록 그것이 삶의 극한 상황, 곧 하나님이 없다는 상황에 이른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이 하나님은 인간이 앞으로 개척해 나가야할 삶의 자리, 그 역사적 삶의 순간 순간 자신을 드러내실 사건들을 통해 고백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콕스의 이러한 주장은 유신론적 하나님을 벗어나 의심의 불안 속에서 진정한 용기를 통해 하나님이 없어져 버린 시대에 나타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고 말한 틸리히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틸리히에 의하면 유신론적 하나님은
인간의 욕망, 불안에서부터 안정을 얻고 싶은 의지가 상당부분 반영이 되어 만들어낸 “좋으신 하나님”으로서의 이미지에 가깝다. 따라서 이 이미지를 향한 믿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긍정하는 존재에의 용기를 낼 수 없다. ‘그렇게 때문에’ 긍정하고 믿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불안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이 상태는 콕스가 말하는 자율성이 없고, 성숙하지 못한 인간의 모습과 견주어 이해될 수 있다. 여전히 마을 시대에 머물러 있는 나(I)는 절대적 권위를 가진 너(Thou)에게 의존해야만 하는 나-너(I-Thou)의 관계의 시대, 절대적 권위로서의 하나님이 형이상학적 개념에 갇혀진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의 하나님은 언제나 그 곳에 있다. 인간이 기대하는 그 곳에, 인간이 만나기 원하는 그 장소에, 인간이 구원받기 원하는 그 순간에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의 관념 속에 자리 잡는다. 하나의 개념으로 내지는 상상 가능한 존재로서. 전지전능하고 모든 일을 처리해 주는 만능신으로서 말이다. 그래서 인간은 삶의 극한 상황, 하나님이 없다는 상황에 이르지 못한다. 예측 불가능하기에 끊임없이 앞으로 개척해 가야할 삶의 자리에서, 역사 속에서 전개될 다양한 사건들 속에서 만나는 역동적이고 감히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틸리히와 마찬가지로 콕스도 유신론적 잔재, 기독교왕국 시대의 형이상학적 하나님으로부터의 이별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존재에의 용기를 내는 것은 곧 성숙한 인간으로의 성장 또는 성숙한 인간의 책임있는 결단과도 맥락을 같이 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의 극한 상황,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용기를 낼 수 있다는 것은 성숙하고 책임 있는 자아를 소유했을 때에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믿음을 고백한 틸리히와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콕스의 차이가 드러난다. 틸리히는 존재에의 용기가 개인적 결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위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표현이 유신론적,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회귀한 듯한 인상을 풍기나 주목할 부분은 “하나님 위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통해 참 인간됨의 가능성을 인간 스스로에게만 국한시키지 않았다는 것에 있다. 반면에 콕스에게서는 이러한 측면이 강조되지 않는다. 성숙한 인간, 책임 있는 자율적인 인간이 그 어떤 상황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개척해 낼 수 있고, 앞으로의 역사 전개 속에서 순간 순간 드러내시는 감추인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인간에의 긍정이 보다 강조되는 것 같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는 니버가 말한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의 유형
과 흡사해 보인다. 여기서 비판적 지점을 찾아 낼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지나친 신뢰가 오히려 세속시대의 하나님 물음의 대답에 인간을 하나님의 위치에 올려놓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에 대한 긍정은 인정하지만 전적인 긍정은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누구보다도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삶을 사는 인간이 어떻게 스스로 타자 중심적인 성숙한 인간으로 변화하고 성숙할 수 있겠는가? 특히나 인간이 만들어 내는 서열, 계급화, 차이나는 생활 수준 등을 고려해 볼 때, 모든 사람들 특히 교육의 기회가 제한되는 저소득층, 소외계층의 사람들에게서도 책임있는 인간으로서의 성숙함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문제 앞에서 변화의 원동력이 인간 스스로에게서 과연 비롯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그 어떤 힘, 인간이 결단하고 결심하고 끊임없이 성장하도록 도와주고 격려하는 그 어떤 초월적인 힘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 힘은 이 모든 제한을을 넘나드는 그야말로 자유롭고 가장 근원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덧글

  • 하늘나라 야생화 2010/06/23 22:10 # 삭제 답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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