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 신앙감정론 : 은혜와 은혜로운 삶 사이.. by 그루터기







  

  조나단 에드워즈, 정성욱 옮김,  신앙감정론,  부흥과 개혁사, 2005. 
 

이전 식민지 시대는 아직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았던 시대였다. 따라서 종교적 삶은 정치, 사회적 삶의 기준과 같았다. 특히 영국이 미국 식민지의 주도권을 잡은 이 후는 회중교회의 청교도적 삶이 사회를 지배하는 법으로, 기준으로, 신념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그러나 식민지 시대의 미국은 급증하는 이민자와 더불어 새로운 종교적 지형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기독교는 점점 더 다양해지고 있었다.
한편으로 종교는 식민지 환경이 어내는 독특한 상황 속에 있는 사람들의 생활감정에 맞는 종교를 만들어내야 하는 요구를 받게 되었다. 이 과정은 청교도적 전통사회를 이어가고자 했던 자들에게 당연한 위기였다. 사회를 지배하고 사회에 종교적 삶을 요구하는 것이 그들이 뜻하는 바였으나 새롭게 만들어져가는 종교적 지형은 이와 정반대의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기는 또 다른 기회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1차 대부흥의 종교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1차 대부흥은 감성적 종교경험을 중요시하며 개인의 경건과 영성을 추구하였다. 이는 식민지 기독교의 주축을 이루고 있던 교리적-이성적 기독교에 대한 일종의 반란과 같았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대부흥을 이끌었던 대표자 중 하나였다. 바로 『신앙감정론』은 이러한 부흥운동의 시기 속에 쓰여 졌고 선포되어진 설교였다.

교리적
-이성적 기독교, 곧 전통적인 청교도 사회는 부흥운동에서 일어나는 순간적인 회심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설교를 들으면서 혹은 그 후에 갑작스럽고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어떤 변화의 과정, 신앙 결심과 결단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못했다. 전통주의자들은 오랜 교육과 훈련과정을 통해 교회가 가지고 있는 신앙고백을 내면화시켜야 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대부흥 시기에 이루어지는 개인적인 변화의 경험과 이러한 부흥현상을 부정적으로 보고 열정적인 감정에 치우진 열광주의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하기도 했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전통주의자들의 견해를『신앙감정론』에서 반박한다. 개인적인 경험에서 고백되어지는 신앙을 긍정하는 것이다. 특히 에드워즈는 흔히 생각하는 감정의 의미를 영혼의 의지, 성향, 마음의 움직임으로 풀어내어 전통주의자들이 비판하는 열정적이고 순간적인 인간의 육체적 느낌과 차별화 시킨다. 그리하여 참된 신앙 감정이 무엇인지, 참된 신앙 감정(affections)이 거짓된 감정, 단순히 육체적이고 자극적이고 감각적인 격정(passions)과 어떻게 구별되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이 논지는 참된 신앙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참된 신앙 속에 누리는 감정은 어떤 것인지, 즉 신앙의 본질을 상세하게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에드워
즈에게 신앙 감정은 영혼의 의지, 성향, 마음과 관련되어 나타나는 영혼의 움직임이다. 인간의 영혼에 이러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인간적이고 일반적인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영의 내주하심이었다. 성령의 내주하심에서 인간은 비로소 영혼의 감각이 변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 영적인 감각, 미각의 변화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함, 도덕적 탁월함을 볼 수 있게 되었고 그 거룩함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인간은 영혼의 감정을 통해 진리를 이해하고 확신하게 된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본 인간은 겸손해 질 수 밖에 없다. 두려워 하나님을 경외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하고 추악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거리가 놓여져 있다는 것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거리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하게 되는 변화는 인간 스스로에게서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변화이기에 크나큰 은혜이다. 이 은혜는 그래서 자애(Charity)와 같은 것이다.

이제 이 변화는 인간의 성품의 변화,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으로 확대되고 더욱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키운다. 변화의 과정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일시적일 수도 없다. 이 변화 속에서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맛보는 달콤함을 누렸고, 이 달콤함 속에 참된 행복과 즐거움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즐거움은 인간적인 것, 인간적인 상상에 기반한 감각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래서 초자연적인 것이다. 단순한 감각적이고 자극적인 순간의 격정과는 견줄 수조차 없는 것이다. 에드워즈가 신앙감정론에서 말한 감정은 바로 이 초자연적인 것에서 누리는 영혼의 기쁨, 행복, 달콤함과 같은 것이다. 이 감정이 참된 감정이고 이 감정에서 참된 신앙인의 삶이 이루어 질 수 있다. 그러나 이 감정은 구분해 내기도 판단하기도 쉬운 것이 아니다. 성령의 역사는 다양하기 때문에 비밀스럽게 역사하시기도 하지만 인간이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도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 판단은 인간의 몫이 아니다. 그저 인간이 해야 하는 것, 신앙인이 해야 하는 것은 참된 신앙인으로서의 삶이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신앙인이 마땅히 해야 할 바는 타인의 신앙과 감정을 구분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 감정의 지표를 따라 스스로를 성찰하며 “열매”를 맺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에드워즈는 감성적 종교경험을 중요시하며 개인의 경건과 영성을 추구하는 그 시대를 넘어선 신학적 통찰력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교리적-이성적 기독교, 전통적 기독교와의 차별성을 보여주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에드워즈는 그 당시의 역사적 삶 속에서 호흡을 같이 하는 신앙인이기도 하였다. 에드워즈는 칼뱅주의적 청교도 신학의 전통을 견지하면서 교회부흥에 관한 외조부 스토다드의 열심을 발전시켜 부흥운동의 신학적 근거를 탁월하게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의 칼뱅주의적 청교도 신학의 영향은 곳곳에서 살펴볼 수 있다. 가장 특징적인 부분은 전통적인 신앙고백의 중요성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이 신앙고백은 기독교의 본질적인 것에 대한 고백이었다. 곧 예수의 메시야 되심이다. 그리고 이 신앙고백은 그리스도인의 전제였다. 회개는 신앙고백에 필수적인 것이었고 이와 함께 세례를 받기 위한 필수적이고 가시적인 조건이기도 했다. 세례는 공적으로 행해져야 하는 것이었다. 또한 신앙을 고백한 자들이 자신들이 고백하고 있는 내용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일반적인 능력을 갖추도록 신앙의 원리들을 충분히 교육시켜야만 했다. 이렇게 본다면 물론 개인적인 경험과 경건에서 고백이 이루어진다는 측면에서는 전통주의자들과 차이는 있겠지만 교육과 소정의 훈련과정이 이루어져야 하며 공적으로 행해져야 하는 부분도 있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그 영향을 찾아볼 수 있겠다. 그리고 결국 에드워즈가 말하고자 했던 신앙의 거룩한 실천적인 부분, 열매 맺는 신앙을 위한 삶도 그 엄격함이나 철저함에 있어서 당시 사회에서 강조되었던 청교도적 삶과 견주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

에드워즈는 인간이 만날라야 만날 수 없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거리를 말했다. 그래서 모든 변화는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다. 성령의 내주하심에서 시작된 인간의 영혼의 변화는 인간이 하고자 의지해서 이루어낸 업적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은혜이다. 인간이 이룰 수 없는 것이어서 은혜다. 만약 인간이 이룰 수 있는 것이었다면 그간 들여야할 노력에 대한 보람 정도나 될 수 있을까. 허나 노력에 대한 보람과는 비교할 수 조차 없이 격이 다른 이 은혜는 인간의 삶을 바꿔놓는다. 그래서 에드워즈가 말한 대로 은혜로운 삶은 은혜의 증거가 된다. 은혜를 받았기에, 은혜를 누렸기에 그 은혜를 따라 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은 에드워즈에게 거룩한 실천을 의미한 것이었다. 에드워즈에게서 거룩한 실천은 죄와 엄격하게 거리를 두는 삶이었다.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죄와 함께 살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죄와의 철저한 단절, 그리고 순종적인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에드워즈는 이 은혜로운 삶에는 삶의 참 행복과 달콤함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맛보며 참여하는 초자연적인 감정이 그것이다. 이러한 에드워즈의 견해는 필자에게 루터가 쓴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떠올리게 했다. 루터는 여기서 역설적인 두 가지 명제를 설명한다. “그리스도인은 만물의 주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만물의 종이며 모두에게 예속된다.” 루터의 주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은혜로 말미암아 인간은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고 그래서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만물의 주와 같이 되고 예속됨이 없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에게 새로운 삶을 제시한다. 이 삶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삶, 사랑의 삶을 살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에드워즈가 말한 거룩한 실천과 다른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래서 루터는 그리스도인은 만물의 종이며 모두에게 예속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루터는 이 과정이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이루어져가는 기쁨의 과정이라고 역설한다. 은혜로운 삶에서 누리는 삶의 참 행복과 달콤함이 이것이 아닐까.

필자가
 의도하고자 하는 것은 에드워즈와 루터의 신학을 비교하고자 하는 거창한 의도가 아니다. 다만 이들이 고백해 내는 신앙의 역설적인 모습이 지금의 필자의 삶을 끊임없이 지켜보고 비추어보게 만들기 때문에, 필자의 삶의 영역으로 삶의 질문으로 던져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 닮음꼴 속에서 필자가 주목해서 본 부분은 하나님의 은혜였고 이 은혜로 맛보게 되는 달콤함, 행복, 자유였다. 과연 이러한 경지는 어떻게 이를 수 있을까. 이 질문을 던져보게 되면 언제나 그렇듯이 좌절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는 인간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전적인 은혜가 그것이다. 그러면 또 다른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 은혜를 경험한 이후 은혜로운 삶을 사는 것, 거룩한 실천을 행해 가는 것은 어느 정도 인간의 의지가 반영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인간의 의지가 반영이 된다면 그 변화가 과연 진정한 변화인가? 아니면 인간이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그 순간도 하나님의 은혜가 그 인간으로 하여금 은혜로운 삶을 살도록 인도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은혜로운 삶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 행복, 달콤함은 어떻게 누릴 수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로 아니면 어느 정도 필요한 인간의 의지로? 만약 행복과 달콤함과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면 은혜로운 삶을 살고 있지 않은 것과 다름 아닌 것인가? 그래도 거룩한 실천을 살기 위해 힘겨운 안간힘을 벌이고 있다면 그 안간힘은 인간의 교만함의 표본이 되는 것인가?

여기
 즈음에 이르면 이러한 잠정적인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미 임했지만 항상 임하고 있지만 인간인지라 눈이 가려져서 항상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더 간구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하고 말이다. 그 가려진 장막을 어떻게 열 수 있는 것인지. 인간이 열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열어내야 하는 것인지. 정말이지 때로는 숨막힐 듯한 청교도적 삶, 엄격한 기준을 적용시키며 죄와의 단절을 추구해가는 어떤 구별된 삶을 살아가고자 노력한다면 진정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인지 알게 해달라고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상황마저도 초월하게 하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더욱 간절해진다. 어차피 앞에서 언급했듯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는 그저 좌절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마지막 고백이 나온다. 그렇지 않은 삶이라 하더라도, 행복과 달콤함과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삶이라 할지라도 은혜 앞에서 날마다 좌절하는 이 힘겨움이 진실로 기쁘다고 고백하는 것, 그 단계가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궁극적인 완성의 단계가 아닌가 하고 말이다. 

은혜와
 은혜로운 삶은 그래서 언제나 필자에게 신학적 화두를 넘어선 삶의 화두이다. 언제나 밀고 당기는 긴장관계에 있다. 그마저 주도권은 인간인 필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확신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다. 그저 고백할 수 있을 뿐이다. 여기까지나마 오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다고.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2008. 4. 18. 글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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