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진 피터슨, 양혜원 옮김, 이 책을 먹으라, IVP, 2008(초판 7쇄)
학문적인 언어와 목회적인 언어는 다소간에 차이가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 둘의 차이에 대해서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각각 그 언어가 사용되고 있는 현장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둘의 차이는 때로 갈등하기도 한다. 아니 서로에 대한 불신이 깊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학문적인 언어(신학자들이라고 지칭해도 무난할 듯 싶다)의 자리에서는 목회적인 언어(목회자들이라고 지칭해도 무난할 듯 싶다)의 자리를 깊이 없고, 타협이 가득한 곳이라 짐작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사실일 가능성도 크다. 반대로 목회적이 언어의 자리에서는 학문적인 언어의 자리를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때로는 무시하며 현실을 모르는 상아탑의 언어라고 짐작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 또한 사실이다. 이 둘의 자리는 분명 서로에게 필요하며 서로를 상호 보완해야 하는 자리임에 틀림없다. 마치 초대교회 시절, 교부들의 시대에서는 목회자가 곧 신학자였고, 신학자가 곧 목회자였듯이 말이다.
유진 피터슨의 언어에서는 이 둘의 교차지점을 읽어볼 수 있는 것 같다. 신학적인 깊이를 확보하기 위한 책 읽기를 멈추지 않은 지속적인 노력을 한 흔적이 골골이 패어 있고, 목회적인 현장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자신의 신학을 목회에 접목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경험한 과오들을 극복해 나가고자 했던 시도들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성서 읽기를 '영적 독서'로 말하며, 성서를 개인의 수단으로 격화시키는 것을 경계하는 대신, 성서가 자신을 드러내도록, 성서의 세계로 들어가 참여하고 살아내기를 권고하는 그의 주장은 그래서 보다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성서 속으로 들어가는가, 성서를 인간 개개인 속으로 끌어들이는가? 이것은 인격으로 다가오는 하나님의 계시,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을 비인격화시키는가, 인격 대 인격으로 만나는가의 질문이다. 이를 경계하기 위해 '렉치오 디비나'의 방법을 제시하는 그의 주장은 충분히 숙고할 만한 내용이다. 은유의 세계, 이야기의 세계를 바라보고,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가며, 대화함으로써 살아내는 성서 읽기는 성서를 먹어내는 유용한 방법이다. 글을 말의 세계로 옮겨내고 마침내는 몸으로 살아내는 번역의 작업은 기독교 신앙인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매혹적인 작업이어야만 할 것이다. 신학은 목회와 연관되어야 한다. 목회는 신학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살아내야 하는 삶이어야 한다.
1. 험난한 영적 독서 훈련
나는 그들이 성경을 주먹 세례를 날리는 책, 얼음을 쪼개는 도끼로 보게 하고 싶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 전략은 주로 목청을 높이는 것이었고 그러한 은유가 가진 폭력성을 거의 눈치 채지 못했다. ... 강제로 먹이는 것은 영적 독서에 내재하는 독특한 성질을 전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p.31)
2. 성경을 먹는 거룩한 공동체
먼저 우리는 하나님과 접촉하기 위해서 황홀경의 환영에 빠지는 것을 거부했다. 고양된 감정적 상태는 아주 매력적이며 특히 청소년들에게 더욱 그렇다. 그러한 감정에는 정말로 직접 접촉하는 듯한 짜릿함이 있다. 너무 진짜 같고, 너무 생생한 느김인 것이다. '열광주의'라는 명칭이 붙은 이 길은 많은 사람들을 유혹해서 정도를 벗어난 자기 만족과 중독의 막다른 골목으로 이끌었고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 ... 한편 우리는 자기 안에 있는 신적인 잠재력을 일깨우고 전시하기 위해서 도덕적 영웅주의라는 헤라클레스의 임무를 떠맡는 것도 거부한다. ... 우리는 또한 산속 동굴로 들어가서 자신의 모든 생각과 감정과 욕망을 다 비워 실재에 대한 직접적 접근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는 모든 것을 없애 버리는 것도 거부한다. 그러한 행위에는 무언가 아주 단순하고, 순결하고, 정돈된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 그러나 오늘날 가장 선호되는 '텍스트'는 최고의 권위자인 '자아'인 것 같다. (pp.40-41)
나는 삶의 권위로서 성경보다는 개인의 체험을 받아들이는 관례가 만연한 현실에 반대하고자 한다. ... 나는 성경을 다시 중심부로 이끌어와 그리스도인의 삶을 깊이 있게 하는 텍스트로 세우고자 한다. 나는 권위있는 성경이 권위있는 자아로 대치된 현실에 대항하고 그것을 폭로하여 개인의 체험을 성경의 권위 아래에 두고자 한다. 나는 성경을 우리가 따라 살아야 할 텍스트로 우리 앞에 제시하고자 한다. 그리고 영성 행세를 하고 있는 종교심리학, 자아 개발, 신비적 실험, 실속 없는 경건의 모양 등과는 대조적으로 굳건하게 서 있는 이 텍스트를 제시하고자 한다. (p.42)
3. 텍스트로서의 성경 : 하나님이 계시하시는 것 배우기
언어의 본질은 정보를 주는 것이 아니라 형성하는 것이다. 언어는 최선의 상태에서 인격적이 되고 계시의 특성을 띤다. 그리고 계시는 언제나 무엇인가를 형성한다. (p.52) ... 우리는 성경을 계시라고 부른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과 자신의 길을 계시하셨다.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알려 주시기보다 자기 자신을 보여주신 것이다. ... 이것은 인격적으로 전달된 계시인 것이다. 이 계시는 우리를 어떤 일에 참여시키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으로서 사는 것의 의미를 인격 대 인격으로 알려 준다. (p.53)
4-5세기가 되자 교회에서 뛰어난 지성을 가진 이들이, 성경을 읽는 일과 하나님이 어떻게 인격적이고 독창적으로 자신의 주권을 우리 가운데 행사하셨는지를 이해하는 일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들이 만들어 낸 삼위일체 개념은 매우 천재적인 것으로서, 하나님의 전 존재와 그분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행하시는 모든 일을 설명하고, 동시에 우리가 누구이든 무엇을 하든 어디에서 왔든 상관없이 우리 모두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줄 만큼 충분히 크고 충분히 상세한 개념이다. (p.56) ...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계시의 모든 부분, 모든 양상, 모든 형태는 인격적이라는 점이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관계적인 분이시다. (p.57)
성경을 가지고 삼위일체적인 생각과 기도를 하게 되면, 하나님이 성경에서 자신을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시하신 포괄적이고 인격적인 방식대로 우리를 포괄적으로 형성하시는 과정에 굴복하는 태도가 계발된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자신형성의 과정을 직접 관리 할 수도 있다. (p.64) 자기 자신을 책임지는 신적인 자아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적인 자아는 일종의 성삼위일체로 이해된다. (p.65) 이 새로운 삼위일체는 하나님이나 성경을 없애버리지 않는다. 다만 필요와 욕구와 느김을 섬기는 자리에 놓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주권의 특전이다. (p.68)
눈에 띄는 자리에 성경을 꽂아 놓는 것으로 성경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면서 동시에 자아를 삶의 권위있는 텍스트로 삼는 것의 위험은 엄청나게 크면서 동시에 은밀하게 진행된다. (p.69)
4. 형식으로서의 성경 : 예수님의 방식 따르기
성경은 기본적으로 거대하고 광대한 불규칙하게 뻗어 있는 내러티브다.(p.78) 이야기는 단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참여를 요구한다. 정직한 이야기는 우리의 자유를 존중한다. 그러한 이야기는 우리를 조작하지도 않고, 강제하지도 않으며, 인생에 대한 주의력을 흩트리지도 않는다. 정직한 이야기는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고 복을 주시는 넓은 세상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p.79)
성경을 텍스트로 사용하는 영성신학은 우리에게 도덕적 규칙을 제시해 주면서 "여기에 맞게 살라"고 말하지 않는다. 혹은 교리 체계를 제시하면서 "이렇게 생각하면 잘 살 것이다"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성경적인 방식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야기 안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이 안으로 들어와 살라. 하나님이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이 세상 속에서 인간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인간이 되어 가고 인간으로 성숙한다는 것인 것이다". (p.84)
만약 기독교의 성경을 단지 계몽을 위한 또 하나의 도구나 권력이 되는 지식을 얻는 길로서만 다룬다면 신성모독을 범하게 된다. 우리가 성경을 사유화해서 그것을 흔히 '영감'이라고 습관처럼 부르는 것을 얻기 위해서 사용할 때에도 우리는 형식을 모호하게 만든다. 인격적인 것은 사적인 것과는 다르다. 사적인 것은 소유하고 격리시키며, 개인적으로 통제하거나 사용하기 위해서 공동의 선으로부터 분리된다. 그러므로 사유화는 훔치는 행위다. 성경을 사유화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라는 공동의 화폐를 횡령하는 것이다. 계시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리를 끄집어내며, 우리가 맹렬히 지키는 개인성으로부터 우리르 끄집어내어서 책임과 공동체와 구원의 세계, 하나님의 주권의 세계로 들어가게 한다. (p.88)
사실 관계가 가깝고 친밀할수록 우리는 정확하게 듣기 위해서, 철저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적절하게 대답하기 위해서 더 많은 신중을 기해야 한다. 이 말은 우리가 더 '영적'으로 될수록, 더 신중하게 주해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기독교 신앙 안에서 더 성숙해질수록 우리는 더 엄격하게 주해를 해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의 말씀은 그 텍스트를 오염시키는 개인적 기호와 문화적 가정, 죄의 왜곡, 무식한 추측으로 계속해서 덧칠되고 있다. (p.99) ... 그렇다. 겸손이다. 우리가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할수록 우리는 홀로 나서서 자신의 놀라운 지식을 가지고 자신과 다른 사람의 인생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운영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p.106)
5. 대본으로서의 성경 : 성령 안에서 우리의 역할 해내기
오늘날 기독교 공동체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급박한 과제 중 하나는, 성경을 자기 주권적인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는 태도를 버리고, 그 성경을 철저히 살아내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단언함으로써 그러한 자기 주권성에 대항하는 것이다. (p.110) 영적 독서란 바로 참여의 독서를 의미했다. 그것은 지면에 기록된 모든 단어를, 내가 참여하고 있는 어떤 것을 확장하고 심화하고 교정하고 확인하기 위해 읽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p.128) 여기서 핵심은 순종, 즉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한 능동적 반응 속에서 사는 것이다. (p.129)
성경에 성부, 성자, 성령으로 인격적으로 계시된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는 성경을 읽지 않는 세상과 동떨어져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세상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모든 창조 세계와 역사를 하나님 앞에 가져오고, 우리의 몸과 인류의 모든 아름다움과 필요를 하나님 앞에 찬양과 중보로 내어 드리고, 그리스도께서 삼위일체의 강력한 이름으로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신 이 세상에 침투하고 섬기는 것이다. (p.135) 우리가 책을 먹고 이 텍스트를 내면화하는 거룩한 공동체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해방되어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p.138)
6. 독자여 주의하라
누군가가 말할 때 우리가 하는 일은 듣는 것이다. 누군가가 글을 쓸 때 우리가 하는 일은 읽는 것이다. 말이 먼저 온다. 글은 말에서 파생된다. 그리고 만약에 우리가 말 즉 하나님의 말씀의 힘은 온전히 다 느끼고자 한다면 그 말에 있는 구어의 성격을 회복해야 한다. (p.152) '렉치오 디비나'의 임무는 잉크로 쓰였고, 이제는 피로 다시 쓰인 그 말을 사람들이 주의해서 듣게 하는 것이다. (p.154)
7. 주께서 나를 위해 귀를 파셨으니
'렉치오 디비나'. 텍스트를 질문과 대답, 개념 정의와 교의로 탈인격화하는 것을 경계하는 독서방식. (p.155) '렉치오' 읽기의 출발점은 ...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자 성경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인 은유를 고찰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p.160) 은유라는 수단을 통해서 우리는 개별적인 사물 이상의 것을 보며, 모든 것을 다른 모든 것과의 역동적인 긴장과 관계 속에서 인식한다. 은유의 언어는 모든 단어의 상호 연결성을 표현한다. (p.165) 우리는 성경 속에 뒤죽박죽 엉켜있는 은유 속에서 자신을 발견함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정보 혹은 '교리'를 수집하는 학생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p.167)
'메디타티오'. 묵상은 텍스트에 나오는 말을 바라보는 것을 넘어 텍스트의 세계로 들어간다. (p.169) 묵상은 침입이 아니라 반추다. 계시 전체의 이미지와 이야기가 우리의 이해력을 꿰뚫고 들어오게 하는 것이다. (p.173) 우리는 텍스트와 공감하기 위해서 묵상한다. 우리는 비판적인 아웃사이더에서 수용적인 참여자가 되는 쪽으로 이동해 간다. 이 텍스트는 더 이상 냉정하게 거리를 두고 전문성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장난스런 호기심을 가지고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p.174)
'오라티오'. 언어는 본질적으로 연결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대화체다. 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가 계시의 문법, 하나님 말씀의 문법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기도는 편안하지만 비좁은 자아의 세계로부터 나와서 자기 부인의 세계, 드넓은 하나님의 세계로 찾아가는 길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자각하고 하나님 차원에 딱 들어맞는 존재가 될 수 있도록 자아를 제거하는 행위다. (p.183)
'콘템플라티오'. 렉치오 디비나의 마지막이자 그것을 완결짓는 요소는 관상이다. 관상은 성경의 계시에 굴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우리 안에 받아들이고, 허세 부리지 않으면서 그것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p.190) 관상은 읽은 바를 살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 어떤 것도 낭비하지 않고 그 어떤 것도 저장해 두지 않고 삶에서 그것을 다 써 버리는 것이다. (p.191) 말은 이미 물리적이다. 그것은 말을 예수님의 육신으로 만든다는 의미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잉태되는 것이다. 그것은 '선물'이다. 그것은 우리가 잘 수용하고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p.195)
8. 하나님의 비서들
9. 메시지
언어의 신성함은 무게를 달거나 치수를 잴 수 없는 것을 드러내는 능력, 신의 것이든 인간의 것이든 영을 드러내는 능력, 즉 내적 실재를 드러내는 능력에 내재한다. 언어가 위선적인 말이나 진부한 말 혹은 허위의 말로 타락하게 되면 언어는 인간의 혹은 하나님의 신성한 본질을 침해한다. 그러 때 언어는 인간이든 신이든 그 실재를 그것보다 못한 비인격적인 무엇, 내가 조작하거나 이용할 수 있는 사물이나 이미지로 축소해 버린다. 상향의 모독은 언어가 추상적으로 부풀려지거나 레이스처럼 엮인 거미집처럼 비실체적인 거시 될 때 일어난다. (p.229)
성경을 읽고 성경에 반응하는 문제에서라면 하향 모독보다는 상향 모독의 위험이 훨씬 더 큰데, 그 이유는 단순히 상향 모독이 간파하기 더 여럽기 때문이다. 화가 나서 "빌어먹을 하나님!"(God dammit) 하고 내뱉는 말과 같은 공공연한 신성모독은, 예를 들어 떨리는 목소리로 "존귀하시고 높으시며, 거룩하고 비길데 없는 전능의 하나님"이라고 읊조리는 아첨 떠는 경건보다 훨씬 더 이목을 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후자가 오히려 전자보다 더 심하게 언어를 모독할 수 있다. (p.230)
문자적인 것에 대한 선호는 긴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은 무분별한 선호라고 믿게 되었다. 부모로서의 경험에다가 목사로서의 경험이 더해져서, 나는 문자적인 것이 위험한 이유는 모든 언어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모호성을 무시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에 유념하게 되었다. 극단적 문자주의는 모든 단어를 고정된 부동의 위치에 강제로 끼워 맞출 것을 주장하며, 모든 문장에 구속복을 입힐 것을 주장한다. (p.283)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번역하는 일에 협력하는 사람들이며, 이 텍스트를 읽고 난 다음에는 그것을 살아내는, 그 책을 먹는 사람들이며, 그 다음에는 이 성경을 우리가 살고 있는 거리에서 듣고 있는 그대로의 언어로 옮기는 사람들이다. (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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