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민, 한일 기독교 관계사 연구 : 역사이해의 폭.. by 그루터기










서정민,  한일 기독교 관계사 연구,  대한기독교서회,  2002


이 책의 주요 챕터는 1부 1장과 2부 4장, 3부 3장으로 압축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1부 1장은 말그대로 일본기독교사에 대한 개략적인 이해를 꾀하도록 도와준다. 이 장을 통해서 이 책 전반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다루어질 주제들을 접할 수 있다. 2부 4장에서는 저자의 역사를 바라보는 폭넓고 깊이 있는 시각을 얻을 수 있다. 표상으로 드러난 현상적인 측면과 그 이면에 자리잡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한국과 일본 기독교의 관계로 풀어낸다. 3부 3장에서는 뒤돌아본 역사를 넘어서 내일을 바라보는 미래지향의 관점을 제시한다. 이 내용들을 엮어가는 중심 주제는 "교회와 민족, 교회와 국가"간의 관계이다. 이 책은 역사적 지식들, 수많은 자료들이나 정보들을 나열하는 책이 아니다. 대신 풍성하고 넘쳐나는 자료들을 읽어내는 역사적 시각, 현상 이면의 의미들을 읽는 통찰력을 제시한다. 한일관계사, 한국교회사를 보다 폭넓게, 그리고 보다 풍성하게 읽어낼 수 있는 유용한 틀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배워야 할 것들이 참 많다. 내 말로 설명하지 못하는 주요내용들을 인용으로 남겨둔다. 
 
서문

다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해명으로 주제 설정의 타당성 확보만이라도 가능하기를 바랄 뿐이다. 첫째, 한일의 기독교가 각각의 다원종교문화 상황 하에서 주류 정신사를 주도하는가 라는 전제는 그대로 두고라도, 그 일정한 '조타성', '향도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일정한 시대 안에서 '기독교'는 양국의 각각 중요한 정신적 구회점이 되고 있다. 둘째, 양국 기독교의 역사 자체가 역사의 흐름 전체에서 볼 때 얼마나 일천한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해명의 여지가 없다. 다만 한편에서 보면, 한일 관계사의 시대구분 중에서 근현대사가 지니고 있는 관계사의 중요도나 밀접성은 단순한 시간 비교로는 불가능하다. 바로 그와 같은 결정적이며, 면밀한 관계사 안에서 각각 수용되고 전개되며, 상응했던 공동체의 문제는 산술적 역사성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양국 기독교는 얼마나 논의 가능한 진폭으로 연관되어 왔는가 라는 판단 역시 객관적 평결은 유보할 수밖에 없다. 다만 이미 판명된 바와 같이 이른바 '민족교회'의 양태를 각각 형성하였던 양국 '기독교'는 민족적 갈등과 관계가 중첩된 시대 안에서 긴밀한 관계를 형성해 온 것이 사실이다. 이 역시 상기 주제 설정의 타당성을 지원하는 측면이 아닐 수 없다. (6-7쪽)

1-1. 일본기독교사의 이해

일본국가 사회의 강력한 배제외 일본 기독교인들의 집요한 적응의지가 수용가 일본기독교의 입지 상황이었다. 결국 이러한 상황하에서 일본기독교의 진로와 존재양식은 현실적 선택이라는 철저한 적응 방향설정 이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명분으로는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의 분리'였는데, 특수한 적응환경 속에서의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인다. ... 당시 일본기독교는 신학적 명분과 존재 양식 사이의 일정한 괴리와 모순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한다. 즉 무엇보다 가장 철저히 국가사회에 적응된 기독교의 존재양식을 취하면서도 그 명분으로 밝히는 것은 '신앙과 사회', '종교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하는 것에서 그 모순을 찾을 수 있다. ... 결국 마지막으로 이러한 일본의 기독교는 자신들의 기독교가 일본의 국가적 목표와 이상에 저촉됨이 없고, 오히려 그것을 선양해 나가는데 도움이 되는 '국가적응과 선양'의 기독교임을 변증하여야 했다. (27-29쪽)

결국 수용기 일본기독교는 가장 첨예한 제약 환경으로 국가신도, 종교성 짙은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직면하였다. 이를 극복하는 논리로서 초기에는 수용된 기독교의 신학적 성향을 근거로 삼았다. 즉 '신약적 개인구원론'이나, '복음주의적 정교분리론'이 그것이다. 그러나 일본 기독교는 국가사회의 기독교에 대한 지속적 강압으로서의 '비국민시', 그리고 일본 주류기독교 내부의 국체적응의지 등으로 인해 국가권력이나 사회체제에 대한 배타적 유형으로 구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천황제 파시즘이 고조되면 될수록 적응력을 발휘하여, 국가론에 대한 신학적 성격에서 '정교연결'이나, '정교일치'로까지 볼 수 있는 국가적응형 교회의 전형으로서 '황도적 기독교'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이 '황도적 기독교'의 신학적 명분은 '탈서구, 동양적, 일본적 기독교'라는 토착성을 강조하였다. (30-31쪽)

일본 사회 나에서 '반역', 혹은 이질적 집단으로 경원되던 기도교인들의 전쟁협력은 필사적인 노력에 가까웠다. 더구나 교파교회로 나뉘어 존재하던 일본기독교가 단일교회 조직으로 전환되고 이러한 집중적인 조직의 강화는 국가적 목표에 더욱 강력히 추종하는 외적 형태를 의미하였다. 이는 새로운 종교단체법으로 구체화되었고, 결국 '일본기독교단'의 조직으로 진행되었다. (33쪽)

일본기독교가 전후 즉시 착수한 존재확인의 방향은 서구 민주주의 첨단 담지자로서의 정체성 구축이었다. 즉 일제말 파시즘기에 있어서는 특별히 기독교의 '서구성', '서구편향성'을 제거하고, 이른바 '일본적 기독교' 구축의 목표를 지속적으로 천명하던 일본기독교는 패전 후 일본사회의 한 목표였던 친미, 근대 민주주의의 사회정치적 목표에 가장 근접한 집단으로서의 집단특성을 강조하는 방향에 섰다. 이는 일본 사회 속에서 끊임없는 적응성을 발휘해 온 일본기독교 기왕의 특징을 충분히 발휘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본기독교는 마침내 그 역사적 과오나 신학적 오류에 대한 일말의 반성을 시도하기에 이른다. ... 결국 일본기독교의 전후 변화는 역사적 과오에 대한 참회, 신학적 성찰, 새로운 사회선교 프로그램의 확립 등을 통해 진전되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35-36쪽)

이상에서 검토한 대개 세 가지의 중요한 한일간의 역사적 사건에 일정한 개입을 시도한 일본기독교는 나름대로의 신학적 변증을 지니고 있었다. (일본조합교회의 조선전도, 3.1운동, 신사참배 관련 개입) ... 이를 항목화하면 대개 다음 세 가지 정도의 주장으로 함축될 수 있다. 첫째, 한국교회는 유태적 구약기독교의 단계에 머물러서 민족적 단위의 집단 구원을 원하는 정치성, 편협한 애국주의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둘째, 이미 복음주의적 신앙과 교회제도를 확립한 근대적 국가의 교파교회들이 국가와의 관계형태로서 채용하고 있는 '정교분리'의 원칙적인 정책을 올바르게 실현하고 있지 못하다는 비판이었다. 셋째, 서구 선교사들의 서양적 신학이나 교회체제를 그대로 답습하여 거기에 예속되는 교회형태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 이렇듯 일본기독교의 한국문제에 대한 인식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신학적 근거를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 반증이라는 중요한 현상을 형성하며 특히 이를 통해 일본 기독교의 자기 국가에 대한 관계형성의 실재성을 발견할 수도 있다. ... 이러한 측면으로 보면 일본기독교의 한국문제 인식과 입장 표현을 통해서 일본기독교 자체를 이해하고 그 역사를 분석할 수 있는 틀을 창출해 낼 수도 있다. (42-43쪽)

1-2. 일본기독교의 국가체제 적응 과정

기독교는 민족과 제휴되어 역사적 실존을 보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 실존성 속에 포함되어 있는 '특수한 정황'은 교회사의 '공통성'과 '개별성'을 결정짓는 요소가 된다. 그러나 교회와 국가는 동일한 차원의 조직이기보다는 상이한 질서와 목표를 지닌 조직으로서 상호 간의 보완과 균형이 요구되며, 이것이 무너질 때 발생하는 파국 또한 역사의 도처에서 증거되고 있다. 즉 교회가 복음의 핵심적 진리를 부정하지 않고서는 민족국가의 정치적 목적에 봉사할 수 없었던 역사적 경험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50-51쪽)

1-5. 일본기독교단의 형성과정

근대 선교가 진행된 피선교국에서 수용된 기독교가 나름의 문화적 토양을 바탕으로 복음을 새롭게 해석하고 그에 맞는 새로운 신학이나 교회제도를 구형코자 했던  것은 긍정적, 혹은 필연적 과정으로 살필 수 있다. 이러한 이른바 '토착신학'이나 '토착교회'의 형성은 교회의 자발적인 성숙 경과 도상에서 발휘되는 일은 역사적으로도 가치 있는 일로 크게 평가할 수 있는 측면이다. 그러나 여기에 교회나 신앙의 외적 요인이나, 특히 정치적 강압이 작용한다면, 전적으로 다른 평가를 내릴 수도 있다. 즉, 선교자측의 교파 특성의 부정, 교파의 통합, 국가 단위의 단일한 신학과 제도의 구형에 있어, 국가권력의 직접적, 간접적 작용이 초래된 사례가 1940년 초에 진행된 '일본기독교단'의 성립이다. 이들 사례는 '현상'에 있어서는 일정한, 바람직한 측면을 지녔으면서도 그 과정의 '외적 강제성'의 요소, 정치적으로 다른 '의도'의 내재 등으로 통합교회의 이상실현이라는 긍정성을 훼손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123쪽)

교파형 교회의 다양한 수용 역사를 지닌 일본기독교에 단일 교회의 교리와 체제를 갖춘 '일본기독교단'이 형성되었다. 여기에는 우선 표면적으로 다음 몇 가지의 역사적 전환이 나타나 있다. 첫째, 교파형 교회가 지닌 일반적 특징인 다교파 상황에서 중심 단일 교단조직으로 기독교회의 체제 외형이 전환된 것이다. 둘째, 각 교파가 지닌 다양한 신앙 신조, 교의, 치리체계의 차이가 합치되어 하나의 신조와 하나의 제도로 통일되는 전환을 보인 것이다. 셋째, 피선교국 교회로서의 일본기독교가 신학적으로 서구 교회와의 상관성을 최대한 벗어나 이른바 '일본적 기독교'를 실현한느 방향으로 전환된 것이다. ... 그러나 이 '교단'의 추진과정과 목표, 활동진로를 면밀히 검토하면, 해석 국면이 전혀 다르게 전개된다. 첫째, '교단' 형성 배경의 국가 강제성이다. ... 일본에 수용된 각 기독교 교파, 교단은 대체로 영미, 서구의 교파 신조, 제도, 본부와 연계된 것으로, '일본적' 가치를 표어로 세계 전쟁을 수행하고 있던 당시 일본 정부의 판단에는 '적성적'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교단'형성 과정에서 드러난 당시 일본 정부의 요구는 신앙 내용은 유지하고 외형 체제는 통일한다는 소극적 연대가 아니라, 제3의 신조와 체제를 통한 일본적인변형 기독교이 창출이었다. 이에 대한 강제성은 '교단'의 역사적 의미를 근본적으로 와해시키는 측면이다. 둘째, '교단' 형성의 방향과 진로 문제이다. 이는 기독교회로서의 신앙적 정통성보다 당시 일본의 국가적, 국민적 가치를 우위에 두는 활동반경이었다. ... 여기서 부언해 둘 것은 이 통합교파로서의 '일본기독교단'의 실체를 두고 해명해 보아야 할 도 다른 신학적 명제와의 상관성이다. 첫째는 토착화의 문제이며, 둘째는 에큐메니즘의 문제이다. (143-144쪽)

2-1. 일본기독교와 '조선전도론'

일제당국의 기독교 정책은 '정교분리원칙'이 아니라 식민지 경영의 유리한 방책에 따른 '제국주의의 정략적 기독교 정책'이었다. 즉 그 기독교가 식민지 경영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될 때에는 이른바 '정교분리론'을 내세워 정치불간섭을 요구하였고, 만약 그것이 식민침략에 유리한 매개체가 될 것으로 인식되면, '정교분리'를 돌연 '정교유착'으로 바꾸고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액수의 선교비 지원도 불사한 것이다. ... 결국 '조선전도론'의 핵심은 복음의 증거나 진리의 전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제 식민지 침략의 완성, 곧 정치가나 군인이 이룩한 무력의 거친 침공으로 인해 발생하는 인심의 동요를 선무하고 종교적 교화를 통한 식민지 민심을 다스리고자 하는 도 다른 침략방책에 지나지 않음을 스스로 토로한 골이 되는 것이다. (183-185쪽)

2-2. 일본기독교와 제암리 사건

제암리교회 사건은 근대 한일관계사 속에서 상징으로 새겨진 '십자가'의 형상이다. 가장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운 역사로서 진정한 구원과 화해를 이루어내신 그리스도 십자가를 연상할 수 있는 사건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일은, 아직도 산적해 있는 한일간의 역사적 문제에 대한 일본의 선행적 속죄와 지속적인 회개, 성의있는 응답의 노정이다. 그와 같은 선행적 과정의 바탕에서만이 진정한 한일간의 화해는 가능한 일일 것이다. (223쪽)

2-4. 일제 하 한일 기독교의 공통과제

양국의 주류 교회의 경우를 두고 볼 때는 역사적 정황의 차이만 있을 뿐 '민족국가 적응형'이라는 측면에서 지극히 공통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 '상황'의 차이는 양국 교회의 존재 양식을 전적으로 다르게 전개시키고 있다. 즉 일본기독교의 경우는 강력한 국가체제의 유지와 확대라는 '정황조건' 속에서 오직 '국가적응 지수'에 관심을 두고 국가체제나 이데올로기에 얼마나 적응해 나갈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 반면에 한국교회는 민족국가의 주권상실이라는 '비상'의 상황하에서 민족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면 지닐수록 현실적 권위인 일본제국주의 통치권과는 갈등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민족지향성이나 그 '적응지수'를 상향시키는 것보다는 그것과 무관한 형태의 내세지향의 종교로 전이되기를 강력히 요청받는 과정을 거쳤다. 즉 같은 '민족국가교회'의 요구 앞에 섰던 두 나라의 기독교 중 일본의 경우는 얼마나 적극적으로 국가적응의 과제를 수행해 나갈 수 있느냐가 존재 양식의 핵심적 관건이었다면 한국의 경우는 독립과 주권을 잃은 민족사회는 교회의 존재 가치를 '민족 적응과 제휴'의 심도로 판별하고자 했고, 달리 현실적 국가 권위인 일제는 그 '정교분리'와 '역할분담'의 성취도로 교회의 건전성을 평가하려 들었다. (265-266쪽)

결국 한국교회는 그 수용기에 있어 '반민족'의 선입관적인 저항을 불식시키고 '친민족'으로 진로를 잡아 나갔다. 이는 특히 두 가지 측면에서 민족정황의 현실에 적극 부응한 것이다. 첫째는 앞서 논의한 대로 카톨릭교회의 심각한 '반민족적' 제형과 그에 따른 박해의 전철을 극복한 것이다. 둘째는 당시 역사적 정황이 일제의 한국 주권 찬탈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친민족'함으로써 '항일민족교회'로서의 신앙형태를 갖추고 한국민족의 정체성 유지와 그 회복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 그러나 바로 이러한 특성이 일제하 한국기독교의 저항과 수난이라는 과정을 잉태했다. 특별히 한국선교를 담당했던 선교본국과 대다수 선교사들은 이러한 한국교회의 존재 양식을 위험한 '정치적 행로'로 판단하여 극심한 통제를 서슴지 않았고, 국가권력을 대신했던 일제 당국은 회유와 압박 등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한국교회의 이와 같은 '민족교회'로서의 존립 양태를 저지하고자 했다. (271-272쪽)

이러한 좌표 상에서 '한국민족교회'는 어떤 성향 변천을 보이는가. 즉 한국교회가 구형될 당시에는 수용된 기독교의 신학적, 신앙적 특성, 곧 '복음주의적' 미국형 교회가 지닌 강력한 '정교분리성향'에도 불구하고 앞서 살핀 바와 같은 한국 민족상황의 불가피성, '반민족적'인 선입 이미지를 극복해야 한다는 현장 요구 등이 복합되어 전혀 다른 출발을 보였다. 우선 '민족'의 '정황'과 '요구'에 부응한 한국교회는 그 '비민족화성향' 지수는 대단히 낮고, 이에 따라 본래의 '정교분리성향'도 유보된 '민족, 정치 관여적 기독교'로 시작하였다. ... (그러나 내외적 요인에 의해) 민족교회로서의 표상적 특성은 크게 와해되고 다수 주류의 교회가 부흥운동, 개인구원 중심의 내면화된 신앙운동으로 이행해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 그러나 한국교회의 민족교회 성향 변천 추이도에서는 이와 같을 일반적인 변수에 의한 변화 추이와는 별도로 살펴보아야 할 특별한 요소가 내재해 있다. 이는 표상의 한 부분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이 표상의 방향이 '민족논리'에서 '신앙논리'로, '정치논리'에서 '종교논리'로 변화하는 것이며 교회의 다수세는 일제 당국이 '정치적'으로 요구하는 민족교회와의 결별 수순을 밟고 있다. 그러나 특히 일제말기 신사참배 문제가 제기되면서 '신앙논리'에만 침잠하여 애초의 민족교회로서의 정체성이나 성향적 특성을 모두 상실한 듯이 보이던 '보수신앙군'에서 새로운 형태의 원론적 항거가 현상화 하였다. ... 이러한 태도와 신앙 양태는 그대로 현상화되어 가장 강력한 '항일 저항'으로 일제 말기의 거의 유일한 민족 정체성 유지의 보루를 지킨 것이다. 이들의 역류적 성향은 좌표 상으로 분석하면, 정교분리성향의 지수는 대단히 높고 비민족교회 성향지수는 현상적으로 볼 때 대단히 낮은 '모순'을 보인다. (276-278쪽)

한국교회는 일제말 신사참배를 필두로 모든 현실적 국가권력인 일제의 요구에 교회의 신앙지조를 내어주는 우를 범하면서도 끝까지 그 명분으로 삼는 것이 신앙과 국가권력의 분리였다. 신사가 종교적 신앙에 포함된다든가, 국체에 순응하는 일이 기독교적 신앙 본의와 상충된다면, 그리고 국가권력의 입장에서 정확히 정교분리의 명분을 제공해 주지 못한다면 그 실행을 유보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는 비록 공허한 명분에 지나지 않았지만 오히려 '정교분리성'의 재강조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즉 이에 반대하여 항거자의 소수를 이룬 이들은 일제의 요구가 정교분리에 어긋난다는 명분이었고, 이를 받아들인 다수는 국가가 천명한 정교분의 선언을 명분적 근거로 삼는다는 전제였다. (280-281쪽)

표상적으로만 보면 일본교회의 경우가 한국교회보다는 더욱 원만히, 이른바 '민족국가교회'로서의 존재 양식에 충실한 측면을 보이고 있다. 즉 '이중적 배후 구조', 원래의 '나라-민족'과 현실의 '국가권력'의 괴리라는 상반된 중첩에 당면하지 않았던 관계로 적응의 정도, 시기적 차이, 내부 유형의 차별만 있을 뿐 해석의 난해한 과정은 발생치 않았다. 다만 일본기독교에 있어서도 주목해야할 측면은 있다. 곧 한국교회의 경우에 이면적 역동성을 발휘하여 '신앙현상학'을 표출한 소수 '신앙그룹'과 동일한 계열의 존재 양태이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는 이들과 동일한 '신앙논리'의 소수자들은 액면 그대로 '반민족', '비국민', '국체반역자'의 자리에 머물러야 했다. 곧 이들은 한국의 자신들과 동일계열의 신앙자들과는 달리 현실적 국가권력 뒤에 있는 본래의 '민족'이나 '수난 중의 원형적 국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282-283쪽)

결국 한일 양국 기독교는 첫째, 전통적 사회가치 체제를 바탕에 둔 점, 둘째, '정교분리형 교파교회'로 함축되는 미국 중심의 복음주의가 선교주체인 점, 셋째, 서구문명과 기독교 복음의 일체화된 수용이라고 하는 '유형적 측면'에서는 지극히 공통적인 면면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한일 양국 기독교의 적응진로는 차별성을 보인다. 우선 출반선상에서 한국교회는 선교된 기독교가 지닌 원형적 속성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민족교회'(정교 유대 형성)를 보이는 반면, 일본기독교는 오히려 철저한 '복음주의 지향 교회'(정교 단절 추구)를 보이며 차별화된다. 그리고 이어 한국교회는 외부적 강압과 내부적 좌절에 기인 점차 초기의 '민족성'을 상실해 가는 진로인 반면, 일본교회는 강력한 국가적응('황도적 기독교') 방향을 구축한다. ... 이는 결국 두 나라의 민족적 '정황', 국가 주권의 '상태'로 상징되는 상황성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여기에서 한국교회는 '민족'과 '현실적 정치세력'을 분리해야 하는 특수상황 속에서 이중적 신앙과제에 대응해야 했다. 반면 일본교회는 국가적 목표와 일치한다는 내외적 요구를 수용하는 형태로 진행한 것이다. (285-286쪽)

2-5. 일제 말 한국기독교 수난의 종교간 갈등 측면

일본 파시즘기 종교정책 내지는 기독교 탄압사의 흐름을 단지 정치적 권위와 종교적 신념간의 갈등으로만 인식한느 데에는 제한적인 측면이 있음은 앞서 논의한 천황제 정치체제의 특수한 성격 이해만으로도 인정할 수 있다. 따라서 그 갈등사, 혹은 탄압사를 종교적 신념 체계간의 갈등으로 이해하는 시각도 일부 유효한 측면을 발견한다. ... 이러한 갈등을 한국기독교의 범주로 한정시켜 본다면, 초기 일제와 한국기독교 간의 갈등이 민족이나 정치적 측면, 특히 한국기독교가 지닌 '민족기독교'로서의 특성에 따라 '탄압'과 '수난'이라는 갈등 구조를 강하게 내포했다면, 후기에 들어서서는 일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이 무렵에 이르면 '정교간의 문제'의 측면보다 '교교간의 문제' 측면이 더욱 큰 내용적 갈등요인으로 전이되고 있음이다. 여기에 이르면 한국기독교의 정치적 성향이나 사회참여의 강도 등 그 표현 양상에 따른 갈등이 아니라 신념, 신앙적 특성, 즉 그 내용상의 성향이 문제되는 구도를 일부 지니는 것이다. 이러한 진폭의 변화에 따라 천황제 이데올로기나 일제 국가권력과 갈등하는 한국기독교의 주체도 달라지기에 이른다. 즉 진보, 사회참여적 신학에 입각, 민족기독교로의 추진성향이 강한 그룹에서 보수적 신앙정조를 지니고 개인적 순수신앙 수호에 몰두하던 그룹으로 갈등의 중심 상대가 달라진다는 의미다. (306-307쪽)

3-1 일본기독교와의 화해와 연대

비록 '사랑'과 '화해'가 더욱 신학적이며, 기독교적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참상의 자리에서 발휘될 때에는 이른바 '수치'와 '회개', 곧 '죄에 대한 두려움'과 '저주의 선포'가 하나의 '다이나미즘(dynamism)'을 지닌다는 의미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죄의 편에 있는 자는 참회를 말하고, 수난과 고통의 자리에 있는 자, 역사적 상흔을 지닌 자로부터의 화해가 들릴 때 '진정한 화해'가 온전한 모습으로 자리잡는다. (347쪽)

'용서'나 '화해'의 순서 앞서는 것은 '속죄'나 '참회'이다. 이런 측면에서 일본기독교는 그와 같은 역사적 순례를 멈추지 않고 있다. '일본'이 모두 다, 그 전체가 참회하기를 기다리겠는가. 그 중 소수의 의인이라도 있다면, 이제 우리가 먼저 그들을 용서하자. 일본기독교는 죄가 없는 의인이 아니라 죄를 회개하는 참회의 의인이다. 그리고 그들은 적극적인 행동양식도 갖춘 실천자들이다. 그들과의 연대는 한일 화해의 가장 확고한 방책임을 권한다. (353쪽)

3-3. 한일 기독교의 역사적 비교와 미래 과제

일본에 의한 한국의 식민지배 상황에서 국가의 목표와 이념에 솔선한 일본기독교와 수난 받는 민족의 편에서 고난을 함께한 한국기독교의 관계는 대결, 갈등, 강제적 제휴의 과정으로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같은 유형을 취했기 때문에 실존 상황 속에서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는 면면을 드러내어야만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본 주류 기독교의 한국전도는 일면 다른 제3세계 피선교지역에서 수행되었던 서구기독교의 제국주의적 선교모형과 성격을 함께하는 모습을 보였다. ... 한편 한일 양국 기독교는 전후 시기에 이르러 정치적 편향성은 그대로 유지하되 입장의 구도를 달리하는 범주 내부의 변화를 보인다. 일본기독교는 전후 일정기간을 경과한 후 일제의 정치적 논리에 순응하여 일본 민중과 일본 침략하에 놓였던 아시아 민중에 대해 저질렀던 역사적 죄책을 고백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한국기독교는 이미 지속적인 신앙유형 변화과정을 겪으면서, 정치적 편향, 구체적으로는 이른바 '민족교회'로서의 정체성이 상당부분 약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해방 후 분단과 전쟁의 민족적 위기에서도 교회 내부 분열에 몰두하는 몰역사성을 보였고, 이승만 정권하에서는 '정치적 친위성'을 강력히 발휘하였다. 다수 한국기독교 세력은 이른바 '비정치적 정치주의'를 나타내며 현실정치에 암묵, 동조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렇게 보면 해방 후 한국기독교는 정치적 입장의 변혁 강도가 지극히 낮은 지수에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365-366쪽)

신앙내면화의 과정을 비교적 충실히 거친 한국기독교, 특히 근본주의 신학과 부흥운동적인 신앙을 추구했던 한국교회는 분단과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하에서 생존의 문제, 현실적 축복과 치병에 신앙성향을 형성하였다. ....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전제를 덧붙여 본다면, 한국기독교의 역사적 경험 속에 근본주의적이고, 부흥회적인 신앙 내면화 과정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374쪽)

어쨌든 분명한 것은 한국기독교에 있어 민족문제는 늘 중요한 과제였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한국에 있어 기독교가 외래적인 이미지를 갖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가. 단순히 아직 역사가 짧은 종교요, 어차피 서양으로부터 전래된 신앙체계의 본질 때문이라고 단정하는 것이 옳을까. ... 이는 민족기독교의 주제가 '정치'에 있었던 연원에서 풀어야할 과제이다. 즉 정리하면 민족수난 상황 속에서 그 고통을 함께 나누며, 국권회복의 비전을 향해 새로운 지표와 가능성을 개척해 나간 기독교의 진로는 충분히 민족적이다. 또한 이것이 '민족종교'로서의 정체성이 크게 다가서는 일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그 주제에 있어서 '정치'의 영역에 철저히 국한되는 민족정체성이라는 점이다. ... 한편 일본기독교를 같은 관점에서 섭렵한다고 해도 유사한 결론이 도출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수용 초기부터 지속된 일본기독교의 '일본화', '일본적'이라는 목표도 대개의 경우, 정치적 문제로 집중되었다는 결과를 보인다. ... 이상에서 양국 기독교의 미래적 지평을 '문화적 과제'로 응집하였다. 이는 역사적으로 검토해 볼 때, '저변'과 '핵심'에 동시 제휴하여 진정한 일치를 이룩하는 매개는 역시 '문화의 영역'이라는 전제를 두고 있는 논의이다. (376-379쪽)

역사는 '정치'에서 논의하였고, 미래는 '문화'에서 발견하였다. 즉 양국 기독교의 역사적 상황은 '정치적 제휴'에서 설명할 수 있고, 미래적 과제는 '문화적 제휴'에서 풀어나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논의한 것이다. ...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문화의 범주는 이른바 신학적 담론으로서의 토착이나, 전통의 종교나 사상, 혹은 여러 대중 관습과의 무분별한 '습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현재와 미래의 가장 평균률적인 가치에서 상정되는 문화와 잘 어울려 상응하고 거기에 성육신하는 진리를 선포하는 일이 될 것이다. 한편 이상의 결론에서 '정치에서 문화로'라는 큰 축의 이동은 다 논의하엿다. 마지막으로 감안해야할 논제는 이른바 '한일 기독교 관계'의 문제이다. '정치'가 주된 주제로 대두되던 역사 속에서, 더구나 '지배와 피지배'라는 불우한 양국 정치 환경 하에서는 갈등과 억압, 굴절된 통합의 과정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문화를 중심 주제의 영역으로 삼아야 하는 미래 지평 속에서는, 더구나 정치적으로도 대등한 동반의 공동 목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는, 이제 한일 기독교도 화해와 협력, 건강한 연대를 모색해야 할 때임을 발견한다. (380-3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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