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강 한국교회사 전사(前史) by 그루터기

제2-1강은 서정민 교수님의 3월 두 번째 주의 첫 번째 시간의 강의 내용을 기록한 내용이다.

역사에서 전사(前史)가 성립할 수 있는가의 질문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여기서 전사라 함은 한국기독교 역사를 이야기할 때 그 원류를 찾아보자라는 측면을 의미한다. 이 때 한국기독교 전사는 그리스도교회를 역사적으로 살펴보기 위하여 가톨릭도 포함한다. 개신교 전통과 가톨릭 전통, 내지는 개신교 신앙과 가톨릭 신앙의 차이로 인해 가톨릭의 포함여부에 대해서는 신학적으로 토론이 가능하겠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가톨릭을 포함해야 하는 것이 나(서정민)의 사관이다. 어떤 사관은 가톨릭을 이단으로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 심어졌던 또 다른 역사적 과정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물론 개신교 전통에 서 있는 신학자로서 가톨릭 전통에 대한 이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가톨릭의 인효론과 신인협동설(구원을 위한 개인의 노력, 구원의 조건화 등)에 대해서는 개신교 전통에 있는 신학자로서 비판적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적인 논의에서는 다르다. 만약 가톨릭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엄격하게 말해 초대교회 역사나 중세교회 역사는 개신교에서 다룰 수 없지 않겠나?

1. 사도 도마의 동양 전도설

역사에는 정사(正史)가 있다. 위사(僞史), 즉 꾸며진 역사도 있다. 그리고 설이 있다. 아직 정사가 되지 못한 역사다.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한국기독교의 전사로서 그 첫 자리는 하나의 설로서 자리잡고 있는 사도 도마의 동양전도설이다. 이는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인도에서의 활동이다. 이 부분은 어느 정도 인정을 받고 있는 부분이다. 둘째는 중국도래설이다. 그러나 이 부분은 아직 가설로서만 논의 되어진다. 

인도에서의 활동은 어느 정도 인정받고 있다. 가장 의심이 많았던 예수의 열 두 사도 중 하나였던 도마가 인도에 와서 활동했다는 것이다. 많은 신앙인들은 도마를 의심 많은 사람이라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데, 실상 우리 같은 사람과 가장 가까운 인물이 도마가 아닐까? 솔직히 직접 보고 만지지 않고서 부활하신 예수를 어떻게 쉽게 믿을 수 있겠나? 도마처럼 예수의 부활을 고뇌하며 의심했던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록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복음서는 위대한 기록이다. 어찌되었든 도마와 바돌로매는 동쪽을 향했다. 나머지 사도들은 서쪽을 향했다. 여기에는 사도들의 선교전략이 있었다. 선교전략 대신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섭리는 기본으로 전제하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저 섭리의 역사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 주변에 공기가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당시는 팍스 로마의 시대였다. 그리스도교는 그 중심부였던 로마를 향해 선교전략적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달리 도마는 동쪽으로 향해서 선교루트를 개척했고, 말라바르 교회의 전통을 만들었다. 그 다음이 중국도래설이다. 여러 학자들은 중국으로까지 갔다고 하는데 증거가 부족하다. 이런 질문이 가능할 것이다. 정말 도마가 중국에 갈 가능성이 있었을까? 당시 중국의 상황에 비추어서 질문해 보자. 

2. 경교의 중국 전래

그 다음은 경교(景敎)의 중국 전래이다. 경교는 네스토리우파 기독교의 신학적 특성을 갖고 있다. 서양의 정통 기독교는 네스토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정리했다. 그 이유는 기독론 때문이었다. 초대교회에서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고백은 가장 큰 논쟁거리였다. 이 논쟁은 피의 역사를 이루었을 정도로 치열했다. 이 때 예수에 대한 질문에서 예수의 인성론과 예수의 신성론이 대립했는데, 네스토리우스파는 예수의 인성론을 강조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곧, 예수는 위대한 인간이었다. 하늘의 사명을 받은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하나님이다라는 것에는 부정적 입장이었다. 따라서 네스토리우스파는 이단으로 정죄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인간적인 입장에서 종교적, 정신적, 영혼적 가치를 많이 언급하는 곳의 지역적 성향은 동쪽이 강하다는 사실이다. 이에 비해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는 지역적 성향은 서쪽, 곧 서방 전통에서 강하다. 동쪽으로 올수록 인간이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단으로 정리된 네스토리우스파가 살 수 있는 방향은 동쪽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네스토리우스파는 페르시아에 자리를 잡게 되었고, 이 후에 중국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A .D. 635년 알로펜 단장과 네스토리우스파 선교단이 중국, 당시 당나라에 도착했다. 당시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 되기 위한 문화정책을 추구했다. 세계의 중심이 되기 위한 정책에는 쉽게 구분해서 모든 것을 흡수하는 것과 모든 것을 배제하고 절대적 배타성을 견지하는 두 가지 종류의 방법이 있을 것이다. 당시 당나라는 포용력있는 정책을 통해 모든 것을 흡수하여 중국화시키는 과정을 통해 세계의 중심이 되고자 했다. 알로펜이 중국에 갔을 때 거부반응이 없이 받아들여졌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또한 알로펜 선교단이 당에 인식되어졌던 양상은 외교관과 같은 인상이었다. 특히 중국에서는 이들이 페르시아에서 왔지만 로마에서 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진경교라고 했다. 대진(大秦)은 로마제국을 의미했다. 이 경교가 당나라에서 유행이 되기 시작했다. 경교는 중국의 왕과 귀족을 공략했고, 당시 상위계층은 경교를 유행처럼 받아들였다.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가 그 증거다. 여기에 경교의 역사가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그들의 선교방법이었다. 그들은 배타적 선포 방법과 적응적 설득방법 중에서 적응적 설득방법을 채택했다. 경교 선교사들이 중국의 종교, 문화를 긍정적으로 습득한 것이다. 당시 중국에서 가장 유력한 종교는 불교였다. 그래서 경교 선교사들은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고, 염주를 만들고, 목탁을 때리며 찬송을 불렀다. 그래서 중국사람들은 경교를 불교의 한 파로 이해했다. 대진사, 경교승이라는 용어로 불교화된 기독교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와 불교는 서로 극에 위치한 종교이다. 구원론에 있어서 상극에 놓여 있는 것이다. 재밌는 건, 이런 기독교가 불교와 조합된 것이다. 네스토리우스파의 기독교적 외형이 불교화된 것이다. 저항이 없이, 거침없이 불교에 업혀 나갔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망했다.


가장 큰 타격은A.D. 845년의 회창멸법이었다. 그러나 이 법의 주 대상은 불교였다. 당시 불교는 나라의 특혜를 받았다.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당의 주요 입지를 차지하고 있던 것이다. 당나라 시대의 온갖 부동산을 소유하고, 병역의 대상에서 제외된 승려들의 수가 증가되는 것 등은 이를 말해 준다. 그러나 이 법의 시행으로 불교의 입지를 좁혔다. 여기에 경교가 망했다. 회창멸법은 불교를 겨냥한 것이었는데, 불교가 아니라 경교가 망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종교사를 보면 민중화가 된 종교는 어떤 박해와 수난 속에서도 살아남는 것을 볼 수 있다. 일본 가톨릭교회는 기리시단으로 일본에 수용되었는데 박해를 받게 된다. 그리고 가톨릭 수난사 때에 거의 근절되고 만다. 그러나 가쿠레 기리시단이 메이지 유신 이후 등장하게 된다. 몇 백 년 동안 숨어있다가 등장한 것이다. 이것은 민중화가 되었기 때문에 살아난 것이다. 상위 계층은 종교도 악세사리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민중은 그렇지 않다. 회창멸법에 의해서 경교가 쇠퇴된 것은 민중화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서정민”의 해석이다. 또 다른 해석을 찾아보라.

당나라에서 경교가 사라졌다. 그런데 원나라, 몽고의 시대(몽고는 역사상 가장 넓은 지역을 통치했던 국가였다. 몽골족의 군사작전이 재밌다. 군사작전에서 군수지원은 상당히 중요하다. 몽골군의 식량은 자기가 해결하는 것이었다. 양의 오줌통에 양고기 말린 것을 넣어 다녔다. 다른 한 통에는 말을 먹일 것을 준비했다. 달리면서 먹었다. 이것이 몽골군대였다.)가 펼쳐졌을 때 다시 등장했다. 원나라도 역시 포용적인 정책을 폈다. 이 때 변방으로 은둔해 있던 경교도들이 들어와 재흥하게 된 것이다. 이들에게는 야리가온(也里可溫)이라는 칭호가 붙여졌다. 그리고 유행처럼 번져갔다. 여기에는 원조 황실의 우호적인 대우가 있었다. 그러나 역시 지배계층의 종교라는 색채가 강했다. 또한 한족이 아닌 몽고족의 종교라는 외래종교로서의 인식 때문에 대중화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문제는 과연 이 경교와 야리가온들이 한국에 전래되었을 가능성 여부이다. 당나라와 통일신라와의 관계를 먼저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당시 승려들은 대부분 당나라 유학을 다녀왔다. (그러나 당나라 유학을 다녀오지 않았던 원효는 한국불교의 시작이며, 불교의 집대성을 이루어냈다. 일본의 불교학자들 상당수가 원효를 연구한다. 꼭 유학만이 능사는 아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전래 가능성은 상당히 농후 했을 것이다. 원나라 시대도 마찬가지, 고려는 원나라에 예속된 상태였다. 야리가온은 원나라의 황실종교처럼 유행되었는데 그 가능성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래서 고대 교회사가들이 한국의 전래설을 주장한다. 십자가돌, 관음상 등을 물증으로 삼는다. 그러나 “서정민”은 이것을 “설”로 본다. (박두진 선생님과의 만남, 그 집에 갔는데 돌이 무진 많았다. 수석에 관심이 많은 분이셨다. 그 분이 하는 말, 이렇게 자연적으로 생긴 돌도 상당하다. 즉 자연 발생의 개연성이 많다는 것이다.)

3. 가톨릭의 아시아 접촉, 선교

경교는 서방교회 입장에서는 기독론적 이단이다. 이제 가톨릭이 아시아와 접촉하기 시작했다. 종교개혁 이전의 가톨릭 동양 접촉은 십자군의 역사에서 시작되었다. 십자군적 사고는 비교도들을 처단하며 세계복음화를 앞당기는 것을 개의치 않았던 선교방법이었다. (십자군운동은 미지의 상태에 있었던 동방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동방의 이교도에 대한 선교적 관심도 고조시켰다. 이와 같은 선교적 관심을 구체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여러 수도단체 및 선교단체들이 창설되었다. 그 중에서도 1209년에 창설된 프란체스코회와 1216년에 창설된 도미니쿠스회는 그 대표적 단체들이다.『한국기독교의 역사 I』 39 쪽) 또 다른 것은 카르피니와 루브르크, 코르비노 등이 있었다. 이들은 로마교황의 사절로서 동양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했다. (13세기 유럽은 몽고족의 서방진출로 인해 위기를 느기고 있었다. 페르시아를 점령했고 폴란드 지경까지 진출한 몽고세력과 타협하여 유럽의 평화를 지키려는 노력이 당시 로마 교황 이노켄티우스 4세를 중심으로 로마 가톨릭교회 안에서 추진되고 있었다. 몽고족과의 타협을 통해 그들의 서방진출을 막고 가능하다면 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므로 기독교 세력의 확산을 꾀하고자 했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이 같은 정책을 수행한 단체가 프란체스코회였고, 교황의 전권대사로 파견된 자가 카르피니였고, 그 이후에 루브르크였다. 그리고 적극적인 의미의 선교사로 파송된 자가 코르비노였다. 코르비노는 중국에 가톨릭 신앙을 확산시켰고, 로마 교황 클레멘스 5세는 1307년에 중국교구를 창설하여 코르비노를 대주교로 임명하여 중국을 중심한 동방 선교를 관장하게 하기에 이르게 된다.『한국기독교의 역사 I』 39-41쪽)

그러나 중세교회는 종교개혁을 통해 전환기를 맞게 된다. 교회가 순수했던 시절은 박해를 받는 시절이었고, 박해가 없는 시절에는 끊임없이 순수하게 선교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중세의 교회는 부패했다. 그 이유는 우선 중세의 교회는 유럽에서 최고의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중세의 교회는 선교를 하지 않았던 교회였다. 당시의 세상 끝은 서쪽 끝, 바로 스페인, 에스파냐였는데 지중해 전체가 기독교화가 됨으로써 땅 끝까지 선교를 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선 기다리는 것을 잊어 버렸다. 그 다음은 자신들 안에서 하나님을 만든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의 반동 종교개혁이 일어났는데 이 때 예수회가 설립되고 선교를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놀라운 자각이다. 가톨릭의 내부각성이 이루어진 것이다. 교회의 본분을 다하지 않았다는 반성이었다. 그러나 이 때 이루어진 선교는 제국주의 선교의 시작이었다. 이에 대한 비판은 다른 각도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바울의 경우는 가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 때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서양 근대 문명을 다 가지고 있었다. 물질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은 가톨릭 제국주의 선교에서 빗나가게 되는데 이것이 한국교회사의 독특한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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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s Goliards : [한국교회사]2-1강 2009-03-12 11:04:26 #

    ... 양 근대 문명을 다 가지고 있었다. 물질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은 가톨릭 제국주의 선교에서 빗나가게 되는데 이것이 한국교회사의 독특한 출발점이다.http://boundary.egloos.com/1403887 ... more

덧글

  • 배나우도 2009/04/22 21:07 # 답글

    너무 좋은 자료입니다^^
  • 야가리온 2009/09/25 17:12 # 삭제 답글

    안녕하세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근데, 한가지 의문을 제기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네스토리우스파에 대해서 간단하게 언급되어 있어서 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읽은 다른 글(중국 기독교회사)에서는 네스토리우스의 기독론을 좀 더 세분화시켜서 설명해두었더군요.

    즉, 예수의 이 땅 사역기간에는 신성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고, 부활 이후 신성이 완성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더군요.
    그리고 이단 정죄부분도 어떤 교권 투쟁의 결과였던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신성을 부정한 것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외의 모든 교리는 가톨릭보다는 (가톨릭에서 정죄되었으므로 당연하겠지만) 개신교 쪽에 훨씬 가깝더군요.

    하나님 나라의 성취 역시 Already - not yet이란 관점이면, 즉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지만, 아직 성취되지는
    않았다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을 때, 네스토리우스의 사상도 이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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