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강은 서정민 교수님의 2009년 3월 25일, 27일의 강의를 기록한 것이다.
자신의 신앙의 잣대로 신학을 공부할 필요가 없다. 신앙은 신학을 볼 수 있어야 하고, 신학은 신앙을 볼 수가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일 잣대로 사고해서는 안된다. 교회사를 공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역사신학적 관점에서 교회사를 볼 필요가 있다. 역사적 관점은 있었던 사실을 가지고 말하는 것을 기초로 한다. 보다 객관적이면서 보다 실제적인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당위나 사유의 세계로 펼쳐질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역사에는 미담만 있는 것도 아니다. 난잡하고 혼잡하며 불편한 사실이 가득한 것도 역사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 가슴 훈훈한 미담을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역사이다. 이러한 역사학적, 신학적 관점에서 교회사를 배우는 자세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1. 귀츨라프와 로드 암허스트호
귀츨라프는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유대계 독일인이다. 이 사람은 런던 선교회에서 파송을 받았다. 종교 개혁 이후에도 가톨릭은 교회의 기반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었다. 반동종교개혁, 가톨릭 종교개혁으로 가톨릭이 해외선교에 프로테스탄트보다 먼저 나설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가톨릭의 자기 반성은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할 부분이다. 선교는 자기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개신교는 이를 할만한 역량을 갖추질 못했다. 종교개혁 이후 계속되는 갈등과 정착의 시간을 거쳤던 것이다. 드디어 공식적으로 개신교가 해외 선교를 추진한 것이 1800년대 초반이었고, 그 선구자들이 로버트 모리슨, 허드슨 테일러였다. 그러나 이들 두 사람의 선교 타입이 다르다. 예수회적 선교방식과 반예수회적 선교방식의 차이와 마찬가지로 개신교에서는 크게 허드슨 테일러 유형과 로버트 모리슨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이는 선교신학의 차이가 아니다. 선교 방법과 선교 시스템의 차이이다. 로버트 모리슨은 시스템에 의한 선교였다. 사전에 준비를 통해 선교 여건을 다 갖춘 다음에 하는 선교였다. 그러나 허드슨 타일러 유형은 눈물과 기도와 열정, 신앙 하나로 들어가는 선교라고 볼 수 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로버트 모리슨 유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맥클레이의 사전 준비 작업이 있었다. 그들이 들어왔을 때 처음으로 시작한 것은 교육과 의료 사업이었다.
그리하여 1800년대 초반에 개신교 선교사들이 동양에 진출하게 된다. 여기서 개신교 선교사들은 유럽의 개신교 선교사들이다. 미국에서의 선교는 보다 후대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동양 선교사들 중의 한 사람이 귀츨라프였다. 당시의 루트는 바닷길로서 인도, 인도차이나 반도를 거쳐 중국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래서 귀츨라프는 중국해안을 따라 동양선교를 하게 되었고, 한국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면서 한국에도 진출하고자 했다. 그가 타고 온 배는 영국의 로드 암허스트호였다. 그러나 당시는 제국주의 시대였다. 제국주의에 대해서는 보다 깊이 있는 공부가 필요하다. 지금도 여전히 제국주의적 요소가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다. 제국주의 무역에서 일어나는 착취와 폭력의 실상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비즈니스가 들어오고 무력 진출이 이루어지고, 정치가 권력을 잡을 때 함께 들어왔던 것이 바로 기독교였다. 때로는 장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거래 물품 중의 하나로서 기독교가 제공되었고, 정치적 지배를 통해 관리를 할 때 마름(소작인과 토지 소유주 사이의 중간 고리역할을 했던 자들)의 역할을 현지인들에게 담당시켰는데 그들 중 상당수가 기독교 개종자들이었다. 지배자의 이익을 위해 종사했던 자들, 그 댓가로 자신의 민족을 착취했던 자들이 바로 기독교인들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제국주의 선교가 만들어낸 모습이다. 또한 마리화나적 신앙의 제공, 고통이 있어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종교적 분출 통로를 제공하기도 했다. 제국주의의 민중선교 패턴은 착취 받는 자들의 현실을 잊게 만드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열심히 일하고 또 일하면 비록 지금은 고달프더라도 언젠가는 부활의 영광이 있을 것이다, 이미 천국의 보상이 기다리고 있다라는 신앙의 강화가 그것이다. 이러한 모습이 제국주의 선교의 모형이다. 귀츨라프도 어쩔 수 없는 제국주의 시대적 삶의 실존을 갖고 있었다.
영혼에 대한 열정, 선교에 대한 열의를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시대적 실존도 마찬가지다. 그가 타고온 배는 제국주의 무역을 위한 상선이었다. 냉철하고 명확하게 실존을 이해해야 한다. 귀츨라프는 상선에 탄 사람들보다는 그래도 지식인이었다. 항로 안내자였고, 통역자였다. 동시에 선교사였다. 무역을 위해 접촉을 시도하다가 결국 로드 암허스트호는 고대도에 정박하게 된다. 그리고 조선과의 통상, 선교 가능성을 타진했다. 그 과정에서 귀츨라프가 성서를 선물로 제공했다. 정부의 회신이 올 때까지 한 달 가량은 합법적으로 체류하게 되었다. 이 소문에 숨어있던 가톨릭 신자들이 나타났다. 이 중 한 사람이 영세를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귀츨라프는 가톨릭과 이체선언을 했고, 대신 한문성경에서 주기도문을 번역하기도 했다. 그 이외에 귀츨라프는 한국인들에게 포도주 만드는 방법, 감자 심는 법도 알려주었다. 한 달여가 지난 뒤 조선 조정은 무역을 불허했고, 로드 암허스트호는 조선을 떠나게 되었다. 귀츨라프가 남긴 책에서 그가 남긴 한국에 대한 기록은 그의 선교 열정과 기대를 짐작하게 해 준다.
2. 토마스와 제너럴 셔먼호 사건
유사한 패턴으로 토마스 목사가 다시 조선과 접촉을 시도했다. 그도 런던 선교회 소속으로 한국 선교를 시도했다. 사실 토마스는 처음에는 중국 선교를 꿈꾼 자였다. 그리고 신혼여행 겸 선교로 아내와 함께 중국에 들어왔다. 그러나 현실은 그가 상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현실에 적응하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제였다. 결국 그의 아내는 오래 지나지 않아 풍토병을 세상을 떠났다. 토마스도 선교사의 직책을 그만두고, 청나라 해상 세관의 통역원으로 취직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에게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가 가슴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한 번민의 과정 속에서 제너럴 셔먼호를 만나 다시 선교의 열정을 되찾으면서 선교의 불모지 한국을 향해 가게 되었다. 그가 타고 온 배는 미국 상선으로서, 접근한 곳은 대동강 유역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는 가톨릭이 심한 타격을 밟고 있었던 때였다. 로드 암허스트호와는 달리 제너럴 셔먼호는 아주 무례한 태도로 통상을 요구했다. 또한 무력을 사용하기도 했다. 당시 평양 감사는 박규수로서 비교적 개방적 인물이었음에도 용납할 수 없는 수위였다. 상호간의 무력 시위 과정에서 제너럴 셔먼호는 서해안 썰물이 대동강 수위를 낮추던 즈음 양각도 모래톱에 좌초되었고, 배는 불탔으며, 토마스를 비롯하여 선원들 모두는 침략자라는 죄명으로 처형되었다. 순교자로 토마스를 볼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를 충분히 제기할 수 있다. 두 번째 개신교 선교 첩촉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한 선교사였다.
3. 제국주의와 기독교선교
라틴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진행된 제국주의 침략과 기독교 선교와의 관계는 이미 큰 흐름의 차원에서 살펴 보았다. 기독교 선교는 사회, 경제적 문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선교사들이 경제적 침략을 위한 제국주의 침략선을 탈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러다 보니 기독교는 지역 지역의 민족주의나 토착문화를 자극하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에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상황은 한국에서 민족교회가 형성되는 과정과 정반대의 양상을 띈다.
재차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유럽은 복음화되었다는 나태함과 매너리즘에 빠졌던 찰나에 일어났던 종교개혁, 그리고 여기에 충격을 받은 가톨릭은 자체 반성으로 예수회를 창설하며 제2차 세계 선교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개신교는 아직까지 그럴만한 여력이 없었다. 가톨릭과의 대결 속에서 어쩔 수 없는 것, 따라서 1800년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개신교 단체가 조직되었다. 그 대표적인 선교단체는 런던선교회였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가톨릭을 등에 업고 선교를 시작했고, 이들이 가는 곳에는 가톨릭 선교사가 함께 갔다. 영국이 바다를 장악하면서 개신교 국가인 영국이 진출하는 곳은 개신교 선교사가 등장하게 되었다. 후발 국가인 영국에 의해서 개신교 선교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한국과 유럽 프로테스탄트와의 접촉이 진행되었다. 그 처음 접촉이 1832년 귀츨라프였다. 어떤 이는 하멜 또는 박연(벨트브레)로 잡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상인이었지, 선교가 목표가 아니었다. 따라서 한국 선교가 목표였던 귀츨라프가 처음이라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로 기록되는 인물이 1866년 기록된 토마스다. 제너렬 셔먼호 사건과 더불어 접촉이 일어났다. 어떤 이는 토마스를 상당히 미화하나, 방증적 의미에서 순교적 성격을 지닌 죽음을 맞이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개척 선교사의 실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 시기에 문제가 되는 것은 제국주의와 기독교 선교라는 문제이다. 당시대가 곧 제국주의의 시대였다. 정치적, 경제적 침략과 불공정 무역이 보편적인 시대였다. 심하게 보면 약탈로도 볼 수 있겠다. 기독교 국가가 당시 전체적으로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힘과 군대, 물질, 가시적 문명이 복음의 뒷 배경에 있었던 것이다. 1차 선교와 비교되는 지점이다. 바울이 로마를 바라볼 때, 처음 선교의 상황과는 정 반대의 상황이 펼쳐졌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것이 좋고, 나쁘다라고 단순하게 단정 짓기에는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제국주의를 배제할 수 없었던 시대에서, 선교도 멈출 수 없었던 지상명령이었다는 점에서, 이 둘이 만났다는 것은 시대적 불가피성을 보여준다. 선교의 루트와 당시의 시대 정신을 함께 볼 수 있는 역사적 안목을 길러야 한다. 리얼리티 그 자체를 읽어야 한다.
제국주의 선교의 가장 큰 특징은 선교비가 제국주의 침략자들의 주머니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일본교회가 한국을 선교할 때, “한국전도”시 지원금이 어디에서 왔는가 하면 바로 조선 총독부였다. 미쓰비시 기업도 한몫했다. 제국주의적 선교모형이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유럽 선교사들 대부분이 기업에서 나오는 경우도 많다. 동인도회사가 대표적 기업이다. 이런 상황을 알아야 당시대 이해가 가능한 것이다.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폭과 결단의 내용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탐색해야 한다.리얼리티에서는 순수하되 해석에 있어서는 이데올로기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사관이다. 역사해석에는 사관과 가치관이 필요한 것, 그것이 이데올로기이다. 그러나 균형 잡힌 시각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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