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강 한국 프로테스탄트 남방 선교루트 by 그루터기

제6-1강은 서정민 교수님의 4월 7일 강의 내용을 기록한 내용이다.

남방주의적 선교방식은 속지주의적이었고, 주로 미국의 교파교회에 의해 주도된 선교였다. 신학적 배경은 전체적으로 복음주의가원칙은 정교분리원칙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역사는 항상 자신의 방향, 의지대로 실현될 수는 없는 것이다. 선교의 과정에서 이 모든 원칙이 실현될 수는 없었다.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만난 대상은 왕실이었다. 알렌은 고종의 어의가 되었고, 언더우드나 아펜젤러도 처음에는 왕실과의 유대관계를 통해서 선교 확장을 시도했다. 또한 국가적 목표와 선교적 목표가 일치되는 모습이 펼쳐지며 민족교회라는 특징을 보이는 면도 정교분리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측면이라 볼 수 있다.

1. 이수정의 재일 활동

북방선교루트의 중심인물이 서상륜이라 한다면, 남방선교루트의 중심인물은 이수정이라고 할 수 있다. 서상륜이 민중과의 접촉루트였다면, 이수정은 엘리트, 양반들과의 접촉루트였다고 볼 수 있다. 이수정은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의 피난길을 보좌한 공헌으로 임오군란 진압 이후 국비유학생으로 신진문물을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가게 된다. 일본 유학 이유는 근대적인 농사법 공부에 있었다. 이수정은 일본에 신사유람단으로 다녀온 안종수로부터 츠다센이라는 농학자를 소개받았는데 츠다센은 기독교인이었다. 일본에서 츠다센을 방문했을 때, 이수정이 처음 본 것은 산상수훈이었다. 그런데 이수정이 여기서 충격을 받게 된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라는 구절 때문이었다. 조선민중의 가난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일본에 왔는데,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명제를 접한 것이다. 그리고 츠다센으로부터 기독교를 배우게 된다. 이수정은 무엇이 조선민중을 위한 길인가, 가난함을 극복하는 농학인가? 아니면 기독교의 진리 수용인가? 이러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면서, 결국 개종을 하게 되고 세례도 받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이수정은 일본기독자친목회에서 한복을 입고 한국어로 공중기도도 하게 된다.

(일본교회는 5월 8일부터 5일간 제3회 전국기독교도 대친목회를 동경에서 열었다. 이수정은 이 대회에서 한국어로 공중기도를 하였으며, 이튿날에는 요한복음 15장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 요지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재하심을 유교의 감응(感應)의 논리를 빌어 설명하였고, 신인상감(神人相感)의 원리를 '등잔의 심지가 타는 것'과 '종이 울리는 것'과 같은 한국적인 비유로 표현하였으며, 예수교의 은혜와 믿음에 의한 속죄와 구원의 도리를 허망한 불교의 자력 구원관과 비교하는 것 등이었다. 그의 이 신앙고백은 문서로 남아있는 한국개신교 최초의 신앙고백서로서 한국인의 마음밭에 복음이 어떻게 수용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귀중한 사례라고 하겠다. -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한국기독교의 역사 I』, 158쪽)

이수정의 개종과 공개적인 신앙고백은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모색하던 재일 미국 선교사들과 일본 교회에 큰 자극을 주었다. 이수정은 재일미국성서공회 총무 루미스(H.Loomis)의 제안을 받아 성경번역에 착수하였다. 여기서도 역시 성서를 중심으로 하는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이수정은 한자 성서에 한글토를 다는 『현토 한한 신약성서』를 번역하게 된다. (현토성서부터 시작한 것은 먼저 번역하기 쉬운 토달린 성경을 일단 완성하여 그 경험을 토대로 한글성경을 번역하려는 준비단계로서의 의도가 있었고 일차적 전도대상이 유학생이었다는 점도 작용하였다. 한문 본문에 토만 달면 되었으므로 착수한지 2달만에 1883년 6월 말에 신약 전체를 완성할 수 있었다. -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의 역사 I』, 163쪽) 그리고 조선민중들에게 농학 대신 말씀을 먹이기 위해서 이수정은 성서를 한글로 번역하게 되는데, 복음서 중에서 가장 먼저 마가복음을 번역했다. 그리고 재일 선교사들의 격려를 받고 미국의 선교잡지에 선교사 파송 요청을 기고했다. 당시 조선은 한 번도 선교사들이 들어간 적도 없고, 철저한 금교 상황이라 신변이 위협받는 상황이었던 베일에 싸인 나라와 같았다. 이런 나라에서 선교 요청이 들어왔고 잔잔한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이 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조선에 들어오기 전에 이수정을 만났고, 그가 번역한 성서를 가지고 들어오게 된다. 남방선교루트가 일본을 거쳐서 들어왔다는 것은 주목해야할 사실이다. 
일본 기독교의 당시 정황과 한국교회사와의 연관성이 간과된 측면이 있지만, 일본의 역할은 대단히 컸음을 이제는 간과할 수 없다. 한국에 오는 남방선교루트는 일본을 거쳐 들어왔음을 역사적 사실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수정의 역할은 생각보다 크다. 그러나 귀국한 1886년 이후의 행로는 불분명하다.

2. 미국 선교사들의 내한

남방 선교 루트의 다른 측면은 미국 선교사들의 한국 선교 타진 과정으로 진행되었다. 매클레이는 일본 주재 감리교 선교사였는데 미국 선교부로부터 조선 전도 가능성을 타진해 보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고종을 알현하게 되는데, 이 때 고종과의 연결고리는 갑신정변을 준비하고 있던 진보파들, 김옥균, 박영효, 윤치호, 서광범 같은 사람들이었다. 결국 매클레이는 고종으로부터 선교를 허락받게 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선교의 허락이라는 단어이다. 이에 관련된 자세한 논의는 다음 강의에서 이루어졌다. 한국에서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드러난  특징은 학교, 교회, 병원의 삼각구도 중심의 선교 진행 이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선교 양상은 표면적으로는 교파 상관없이 거의 유사한 모습을 보였으나, 그 내용적 측면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매클레이는 감리교 선교사였다. 고종이 허락한 것은 교육과 의료에 한해서 였지만 그러나 감리교에 있어서 선교는 교육과 의료 만으로도 충분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선교신학적 판단이 있었다. 따라서 매클레이의 입장에서는 선교의 허락이었다는 것이다. 장로교는 이러한 부분에 있어서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매클레이는 지금의 정동 지역에 땅을 준비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 지역은 차후 진행되는 선교사업의 기반이 되었다. 이 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왔다. 엄밀하게 말하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교육자로 들어온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 이전에 먼저 들어왔던 알렌은 의사로 들어왔다. 대사관 부속 의사가 공식 신분이었던 것이다. 

3. 선교지로서의 한국

조선이 드디어 문호개방을 시작했다. 1876년에는 강화도조약으로, 그리고 1882년에는 한미수호조약을 통해 문호개방이 되고, 마지막으로 1886년에 한불조약을 맺게 된다. 프랑스가 제일 늦었던 이유는 종교 때문이었다. 프랑스의 요구사항 중 하나가 가톨릭의 선교활동 허락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 교회(敎誨)라는 말을 삽입하여 애매성을 남긴 채 조약을 맺게 된다. 서로간의 입장 차이에 따른 다른 해석의 여지가 있을 수 있으나, 이제 선교지로서의 한국의 문이 열린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후의 민중화 과정에서 빚어지는 갈등, 보수파의 압력 등으로 선교는 여전히 어려운 입지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당시 조선의 정치사회적 혼란과 종교적 아노미의 상황 이해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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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es Goliards : [한국교회사]6강 2009-04-17 01:38:20 #

    ... 지해야 하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선교 시작 당시 이미 성서번역이 되어 있다는 것은 중요한 공헌이었다. 추후 더 살펴봐야할 것은 장감의 선교신학의 차이이다.http://boundary.egloos.com/1450067 http://boundary.egloos.com/1450081 ...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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