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커 팔머, 이종태 옮김,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 IVP, 2006.
누군가를 안다는 것과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필연적인 연속성을 가진다. 인식 주체는 인식 대상과의 얽힘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인식 주체가 인식 대상을 온전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다. 이는 인식 주체가 자신도 인식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거나, 아니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서 인식 주체의 자아에 대한 몰이해성, 균형감을 상실한 자아에 대한 오해가 발생한다. 따라서 나를 그리고 타자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또한 나와, 타자와 제대로 관계 맺지도 못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라 할 것이다. 이미 이 관계성의 한계를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여기저기서 깨어짐의 소리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깨어짐이 가득한 곳 중 하나가 바로 교육의 현장이다. 교회에서 특히나 이러한 깨어짐이 가득하다. 인간을 온전하게 하는 은혜를 말하는 교회에 깨어짐이 가득하다는 아이러니. 신앙의 강요가 만들어내는 인식 주체의 무제한적 확대, 증폭은 어느 순간 신앙을 가진 자들이 하나님과 자신을 혼동하는 것에 이르도록 했다.
저자가 말하는 "가르침이란 진리의 공동체가 실천되는 공간을 창조하는 일이다."라는 정의는 따라서 충분히 음미하고 노력해야할 명제임에 분명하다. 저자가 말하는 진리는 '다른 사람과의 언약으로, 서로를 책임지며 서로를 변화시키는 관계를 맺겠다는 맹세로, 미지의 위험에 직면해서도 신뢰와 믿음을 굳게 하는 관계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 관계 속에는 인식 주체, 자아가 무제한적으로 증폭될 수 없다. 오히려 잠시 멈추어 서서 타자를 대면하게 된다. 여기서 '순종'이 제시된다. 그것은 상대방에 대한 예속화가 아니라 '타자를 들음, 실재에 대한 귀 기울임'이다. 따라서 타자가 '사물', '대상'이 아니라 '인격'으로 다가올 수 있게 된다. 진리가 관계적이고 공동체적인 것이 되는 이유이다. 이는 자아에 갇혀 닫힌 논리로 조작하는 대신, 그 논리를 뛰어넘은 포괄성에서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길이기도 하다. 여기서 자아는 진리를 찾는 것 뿐만 아니라 진리가 자아를 찾도록 내어 줄 수 있는 공간을 비로소 갖게 되기 때문이다. 타자가 자신에게 들어오는 것을 포용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격적인 관계, 공동체적인 관계, 진리의 공동체가 실천되는 공간을 창조하는 것은 끈질힌 인내를 요구한다.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것을, 자신이 세계에 투사했던 것들을 거두어 그 원천을 자신 안에서 발견할 때 찾아오는 고통, 고독을 견뎌낼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변화에 직면하는 것은 불안, 고통을 가져다 줄 수 밖에 없다. 새로움, 그것도 알지 못하는 새로움과의 맞닥뜨림은 두려움의 표현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영성이 등장한다. 은혜로의 들어감이다. 자신을 정직하게 대면할 때 찾아오는 선물, 자신을 있는 그대로 용납하고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 은혜가 비로소 다가오는 것이다. 자기 발견의 고통 너머에 정죄 없이 우리를 자신에게로 부르는 사랑, 비로소 거기서 자기 기만을 물리칠 수 있고, 진리에 의한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공간이 열리는 것이다. "사랑"이다. 침묵과 고독, 그리고 기도 속에서, 영성으로 경험하는 사랑 속에 그 가능성이 실존 속에서 실현될 수 있다. 여기서는 깨어짐 대신 회복이 있고, 온전함의 마주함이 있다. 나와 하나님의 혼동도 자리 잡을 수가 없다.
교사 세미나를 위한 책들을 찾고 읽어보면서 좋은 내용을 읽었다. 꽤 괜찮은 내용이다. 다소 읽기에 지루하고 어려운 듯한 감이 없지않아 있지만 시도해 봄직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전반적인 내용 인용
가르침이란 진리의 공동체가 실천되는 공간을 창조하는 일이다. 말하고 들으며 다른 사람들에 대해 요구하고 책임지는 관계들의 풍요롭고 복합적인 그물망 말이다. (18쪽) 즉, 우리 삶의 깨어진 표면 너머에는 모든 삶이 의존하는 '숨어 있는 온전성'이 있다는 영적 통찰에 뿌리를 두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그러한 교육에서는 지성과 영혼은 하나가 될 것이며, 교사와 학습자와 주제가 함게 살아있는 공동체를 이룰 것이며 병든 이 세계에 치유가 일어날 것이다. 그것이 교육의 영성이 지금 주목을 받을 가치가 있고 또 받아야만 하는 이유이다. (29쪽)
1. 안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호기심은 도덕과 무관한 열정으로서 알고자 하는 욕구를 방해하는 어떠한 지시도 거부하려 든다. 지배욕은 권력욕의 다른 말에 불과하며, 도덕과 무관할 뿐 아니라 부패하기 쉬운 것으로도 악명 높다. 만일 우리 앎의 주된 동기가 이러한 호기심과 지배욕이라면 결국 우리는 우리를 삶이 아니라 죽음으로 이끄는 지식을 낳고 말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전혀 다른 종류의 지식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 바로 자비 혹은 사랑에서 기원하는 지식이다. 사랑에서 발원하는 지식의 목표는 깨어진 자아와 세계의 재연합과 구축이다. 여기서 앎의 행위는 곧 사랑의 행위이며 타자의 실재 속으로 들어가 그것을 포용하는 행위, 타자로 하여금 자신의 실재 속으로 들어와 그것을 포용하도록 허락하는 행위이다. (55쪽) 사랑에서 발원하는 지식은 우리를 삶의 그물망에 연루시킨다. 그 지식은 자비 안에서 변화시키는 기쁨의 끈과 더불어 엄숙한 책임 의식의 끈으로 앎의 주체와 대상을 함께 묶는다. 그 지식은 우리를 관련성, 상호성, 책임성으로 부른다. (56쪽)
우리는 초월을 자아와 세계의 실재들로부터 벗어나 위로 혹은 밖으로 도피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일반적인 경향을 거부해야 한다. 오히려 초월이란 사랑의 영이 우리 실존의 심장부로 뚫고 들어오는 것, 불어 들어오는 것, 우리로 하여금 자신과 세계를 전보다 더 큰 신뢰와 희망을 가지고 보도록 말 그대로 '영의 불어 넣는 것(in-spiration)'이다. 초월을 경험하는 것은 벗어나느 것이다. 자아와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이 서로를 끝없이 반영하고 결정하는 마주 선 거울들의 방으로부터 말이다. 기도는 우리를 밖으로 끄집어낸다. 자아와 세계 밖으로가 아니라 그들의 닫힌 순환 논리 바깥으로 말이다. (63쪽)
2. 영성 형성으로서의 교육
나를 사랑의 형상으롤 형성시켜 주는 것이 연구라면, 기도는 형상화 그 이상의 것인 사랑 자체를 받아들이도록 나를 열어준다. 다시 말해 기도는 사랑에 대한 수용성을 갖도록 나를 형성시켜 준다. 나는 영성 공동체의 공동생활을 통해서 연구와 기도의 고독을 벗어나 친교와 관계의 훈련으로 인도된다. 공동체는 나의 주관적 왜곡을 막아 주는 제어 장치다. (71쪽)
앎을 통해 우리가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식은 곧 삶에서 우리가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이 된다. 조금 달리 표현하자면, 우리의 인식론은 소리 없이 우리의 윤리로 탈바꿈한다. ... 우리의 지식은 우리를 앎의 대상과의 관계 속으로, 그 드라마에 참여하도록 이끌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서로와 세계에 대해 초연한 분석가, 논평자, 평가자로서 일정한 거리를 두게 만든다. ... 즉, 객관적 지식은 우리를 우리 자신과 맞서는 적대자로 만든 것이다. (76-80쪽) ... 전근대적 지식의 문제가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을 지나치게 동일시한 것이었다면, 지금 우리의 문제는 그 둘의 소외와 결별이다. 우리는 지식을 주관성의 혼란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려다가 그만 인식 주체를 삶의 그물망 자체로부터 끊어내고 말았다. (84쪽)
교육이 전달해야 하는 메시지는 '사실', '이론', '객관적', '실재' 등과 같은 단어들로 말할 수 없다. 그 메시지는 '진리'라고 불린다. ... 진리(truth)는 "나는 언약을 지킬 것을 당신에게 맹세합니다"(I pledge thee my troth)라는 고대 영어 표현에 나오는 '언약'(troth)과 동일한 게르만 어근을 가진다. 사람은 '진리'라는 단어를 통해 다른 사람과의 언약으로, 서로를 책임지며 서로를 변화시키는 관계를 맺겠다는 맹세로, 미지의 위험에 직면해서도 신뢰와 믿음을 굳게 하는 관계로 들어간다. ... 이렇게 진리란 세계를 가공하고 그것을 자기로부터 멀찍이 둔 채 자신의 필요를 위해 조작하거나 소유물로 삼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 인식 주체와 대상은 모두 독자적인 온전함(integrity)과 타자성(otherness)을 가지며, 한쪽이 다른 쪽으로 함몰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진리는 우리에게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은 서로의 삶에 연루되어 있음을 인정하고 그에 반응할 것을 요구한다. (91-93쪽)
3, 가르침 배후에 숨겨진 가르침
첫째, 관습적 교실에서 연구의 초점은 언제나 외부다. 둘째, 관습적 교육은 '저쪽 바깥'의 실재를 위해 교사와 학생들의 내적 실재는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인식 주체로서 자아의 마음은 결코 탐구의 대상이나 인식의 대상이 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 셋째, 관습적 교육은 인식 주체로서의 자아를 고립시키는 경향이 있다. 넷째, 관습적 교육은 이러한 세 가지 영향의 당연한 귀결로서 우리를 상호 책임을 지는 참여자와 공동 창조자가 아니라 서로를 그리고 세계를 조작하는 자들이 되게 한다. 이러한 교수 방식이 지속되는 이유는 그것이 교사에게 힘과 더불어 안전을 가져다 주는 것 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도 안전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95-105쪽) 우리는 앎의 주체가 되어 세계를 바꾸기를 원할 뿐, 변화를 요구 당하면서 앎의 대상이 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배운다 함은 변화와 대면한다는 것이다. (106쪽)
진리를 배우기 위해서는 그 말들이 드러내 주는 바와 인격적인 관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으로 그 진리를 따라가야 한다. 이런 교육에서는 교사, 학생, 학과의 관계가 순종의 관계가 된다. '순종'은 노예적이고 무비판적인 추종을 뜻하지 않는다. '순종'(obedience)은 '듣는다'는 의미의 라틴어 어근 '아우디레'(audire)에서 나왔다. 순종하기 위해서는 주의 깊게 분별할 줄 아는 귀, 당시 상황의 실재에 귀기울일 줄 아는 귀, 모든 실재에 반응하게 해주는 듣기가 필요하다. (112쪽)
4. 진리란 무엇인가?
기독교적 이해에서 진리는 '저쪽 바깥'에 있는 대상도, 그러한 대상에 대한 어떤 명제도 아님을 보여준다. 진리는 인격적이며, 모든 진리는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 알려진다. ... 육신이 없었던 '말씀'이 예수님 안에서 육신을 취해 우리 가운데 살게 된다. 예수님은 우리를 진리로 부르시는데, 어떤 신조나 신학이나 세계관으로 부르신 것은 아니다. 이 진리로의 부르심은 공동체로의 부르심이다. ... 왜냐하면 진리는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 사이의 개방적이고 신실하고 모험적인 상호 침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112쪽)
우리 자신과 세계 사이의 가장 넓은 '아다이쿠아티오' - 즉 실재를 편협하거나 빈곤하게 만들지 않는 인식 도구 - 는 다름 아니라 우리가 관계를 맺는 역량이다. ... 실재의 구조는 경험주의나 이성주의의 원칙만 가지고는 다 파악할 수 없다. 실재의 궁극적인 구조는 다름 아니라 존재들의 유기적, 상호 관계적, 상호 반응적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그러한 관계로 들어갈 때 비로소 실재에 대한 지식이 우리 앞에 열리게 된다. 가장 깊은 소명은 인간과 비인간 존재의 유기적 공동체에 인격적으로 참여하는 것, 진리의 다른 이름인 돌봄과 책임성의 관계망에 참여하는 것이다. (130쪽)
내가 대상을 알기를 추구할 때, 또한 그 대상이 나를 알기를 추구한다. 바로 그것이 '사랑'의 논리다. ... 이러한 이해에 따르면, 내가 진리를 찾아다닐 뿐만 아니라 진리가 나를 찾아다닌다. 내가 진리를 파악할 뿐만 아니라 진리가 나를 파악한다. 내가 진리를 알 뿐만 아니라 진리가 나를 안다. 궁극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진리를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나를 정복한다. (139쪽) 진리의 핵심에 가장 신속하게 도달하는 인식 주체는 세계와 만날 때마다 "저기 있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물을 뿐만 아니라 "이 만남이 나 자신에 대해 무엇을 드러내 보여 주는가?"라고도 묻는 사람이다. (141쪽) 인식 대상을 인격으로 대하는 지식은 기독교 영성의 핵심과 일치한다. (149쪽) 진리를 인격적인 것으로 보는 견해는 객관적 제국주의나 주관적 상대주의로 이어지지 않는다. (155쪽)
5. 가르침이란 공간을 창조하는 일이다.
가르침이란 진리에 대한 순종이 실천되는 공간을 창조하는 일이다. (157쪽) 배움의 공간에는 세 가지 주된 특징, 세 가지 본질적인 차원이 있다. 그것은 개방성, 경계 그리고 환대의 분위기다. 개방성(openness)이란 공간의 상식적 의미를 말함에 다름 아니다. 공간을 창조한다는 것은 우리 주위와 내면에 있는 배움에 대한 방해물을 제거하는 것, 진리가 우리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숨을 수 있는 장벽을 치우는 것이다. (160쪽) 앎을 위한 공간을 열고자 한다면, 우리는 무지에 대한 두려움과 배움의 공간을 메워 버리려는 불안한 태도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 (162쪽) 공간의 개방성은 그 경계(boundaries)들의 견고함에 의해 만들어진다. (162쪽) 경계는 공간의 개방성을 지켜 줄 뿐 아니라, 핵생들이 그 공간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을 막아주기도 한다. (163쪽) 그러나 배움의 공간은 고통스러운 장소일 수 있기에 거기에는 반드시 또 다른 특징인 환대(hospitality)가 있어야 한다. 환대란 우리가 서로를, 서로의 갈등을, 서로의 새로운 생각을 개방적이고 주의 깊게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환대란 언약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는 분위기, 변화시키는 진리가 가져오는 고통을 견딜 수 있는 분위기를 창조한다는 뜻이다.(165쪽)
우리의 정신이 만들어 낸 세계가 허물어지고, 우리가 우리를 찾아오는 진리를 향해 열리게 되는 자리는 논쟁보다는 침묵이다. (175쪽) 말은 너무 자주 우리를 분열시키지만 침묵은 우리를 하나로 묶어준다. (177쪽) 그것은 우리에게 사람들에게 충고나 해답을 주려는 버릇을 포기하라고 요구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듣는 법을 배우라고 요구한다. (180쪽)
6. 진리에 대한 순종이 실천되는 공간
가르침이란 진리에 대한 순종이 실천되는 공간을 창조하는 일이다. 교육에서 가장 무시되고 있는 실재는 바로 현재 순간의 실재, 바로 지금 여기 이 교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실재다. 교실을 '진리에 대한 순종이 실천되는' 장소로 만든다는 것은 교실과 (과거, 현재, 미래의) 세계 사이의 장벽을 허무는 것이다. (189쪽) 실재는 더 이상 '저쪽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이에 있다. ... 그러한 교실에서는 앎도 삶도 단순한 관람행위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교실 자체가 우리를, 진리가 요구하는 것과 동일한 참여와 책임성으로 부르기 때문이다. (190쪽) '합의'는 우리가 순종과 언약을 실천하는 실제적인 과정이다. (203쪽) 진리에 대한 순종을 실천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해석을 넘어 그 주제 자체가 자신에 대해 하는 말을 듣고자 애써야 한다. (205쪽)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타자의 목소리에 순종으로 귀기울이면 우리 자신의 목소리가 더욱 분명해지고 더욱 정직해진다. 우리는 타자를 통해 우리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운다. (209쪽) 궁극적으로 그것은 당면 주제와 살아 있는 관계를 맺고 있는 교사에게, 학생들을 동등한 동반자로 여기고 그 관계로 초대할 줄 아는 교사에게 달려 있다. (214쪽) 그리고 학생들을 변화의 대상으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학생들에 의해 자신과 주제의 관계가 변화될 수도 있을 만큼 자신을 열어야 한다. (215쪽) 가르치는 주제에 대한 교사의 소유적인 사랑으로 인해 학생들이 그 관계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교사가 주제에 대해, 그것과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 너무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는 바람에 학생들은 주제를 교사의 방식대로만 받아들이도록 강요받고 주제를 평가하거나 그것과 나름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일에서 구속과 금지를 당할 수 있다. 여기서 교사의 열정은 초대가 아니라 강요다.(216쪽)
7. 가르치는 이의 영성 형성
우리로 하여금 타자의 진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하는 겸손은 우리 자신의 진리를 말할 수 있도록 힘을 부여해 주는 믿음과 창조적인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225쪽) 영적인 삶의 역설적 균형은 '우상 숭배가 아닌 숭상'(reverence without idolatry)이라는 덕목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도이취는 숭상이란 큰 것보다 작은 것을 큰 맥락보다 작은 맥락을 더 중요시하기를 거부한다는 뜻이다라고 말한다. (226쪽) 겸손과 믿음, 우상 숭배 아닌 숭상 등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가르칠 수 있게 하는 역설적인 자질들은 도이취의 말에 따르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 속에 정확하게 표현되어 있다. 또한 그 계명은 사랑과 반대되는 두 상극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자기 비하와 자기 우상화다. ... 어떻게 우리는 그 사랑과 접촉하고 그 사랑으로 하여금 우리와 접촉하게 하는가? 아마도 역설과 긴장 안에서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그 방법이 될 것이다. 즉 한쪽 극단을 취함으롤써 역설과 긴장을 해소시키려 하지 않고 그것들로 하여금 모든 상극이 화해되는 초월적 사랑을 향해 우리 자신을 열게 함으로써 말이다. (228쪽)
우리가 진리를 가르치고자 한다면 진리의 전체성은 지성의 파악하고 인식하는 역량은 넘어서는 것이므로, 우리는 지성의 지배를 깨뜨려 주는 훈련을 감수해야 한다. (237쪽) 침묵 속에 있으면 이성적 지성은 전력을 다해 진리를 찾아가는 일에 지치게 되고, 대신 우리를 찾아오는 진리에 자신을 겸손히 낮추게 된다. (238쪽) 우리의 지성은 사물들의 응답을 듣기보다는 그것들에게 그것들이 무엇인지를 말해 주는 데만 너무 익숙해 있다. 그래서 우리가 침묵을 경험하는 초기에 그 경험은 종종 무신론적 체험이나, 우리와 대화하고자 기다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 ('부재'의 경험) 그러나 이 부재 속으로 충분히 들어가기만 하면 역설적이게도 그 현존을 발견하게 된다. (239쪽) 침묵이 나를 화나게 한 것은 그것이 나로 하여금 듣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241쪽)
나는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했다. 이는 내가 하나님을 신조와 교의라는 객관적 언어로 정의했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자아와 세계의 부재도 경험했다. 이는 내가 그들을 객관주의의 구성물을 가지고 정의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침묵에 충실할 때, 하나님이 대상이 아니시라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 다른 자아들, 모든 피조물도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한다. (242쪽) ... 곧 우리는 실재를 새롭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과 세계에게 그들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것을 삼가는 법을 배우며, 대신 그들의 자기 계시에 귀기울이는 법을 배운다. (244쪽)
침묵이 우리로 하여금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해주는 것이라며, 고독은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해준다. (244쪽) 고독과 공동체는 영적 삶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역설의 상극으로서 공존한다. 고독은 공동체를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사랑의 심장부를 향해 우리를 열어 준다. 반면 공동체 안에서의 삶은 우리가 고독 가운데서 접촉하는 그 사랑을 드러내 준다.(245쪽) 그러나 사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따라서 고독도 공동체도 아닌 군중에게 마음이 뺏기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군중이 결코 공동체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니다. (248쪽)
자유와 치유를 가져오는 고독 훈련은 그저 끈기를 가질 것을, 인내를 가지고 자신과 대면할 것을, 자신이 세계에 투사했던 것들을 거두어 그 원천을 자신 안에서 발견할 때 찾아오는 고통을 견뎌낼 것을 요구한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고독은 결국 평온한 은혜의 선물이자, 우리가 자신을 정직하게 대면할 때 늘 찾아오는 선물, 즉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용납하고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 은혜를 제공한다. 자기 발견의 고통 너머에 우리를 정죄하지 않고 우리를 자신에게로 부르는 사랑이 있다. 이 사랑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준다. 그 사랑은 우리가 자기 기만을 물리칠 수 있는 공간, 우리가 진리에 의해 변화되도록 하는 공간을 창조한다. (249쪽)
진정한 기도는 우리의 말이 파하고 지식이 동나는 위대한 신비의 언저리로 인도해 준다. ... 이렇게 깊은 기도 속으로 들어갈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그가 나를 아시듯 아는 것'(to know as we are known)을 시작할 수 있다. (251쪽) 기도 속에서 우리는 진리에 대한 순종을 실천할 수 있는 궁극적인 공간, 즉 우리 모두와의 언약을 지키시는 성령에 의해 창조되는 공간을 발견하게 된다. (2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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