냐. 핵심적 구성요소들
수많은 사람이 삶의 방향 설정을 갈망하고 있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한 분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이 물음에 답을 제공한다. 수많은 사람이 인생길의 이정표를 갈망하고 있다. 우리는 무엇에 의지해야 할까? 한 분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이 물음에 답을 제공한다. 수많은 사람이 삶의 용기와 기쁨을 갈망하고 있다. 우리는 어디서 그 힘을 얻을 수 있을까? 성령에 대한 믿음이 이 물음에 답을 제공한다. (62)
1. 한 분 하느님에 대한 믿음
그리스도교는 전형적인 예언자적 종교다. 구원 사건에서 결정적 주도권이 하느님께 있으며, 인간은 본성적으로 그분과 같을 수 없고 인간적 노력을 통해 같아질 수도 없다. 이 말이 뜻하는 것, 인동 종교에서처럼 합일의 신비나 중국 종교에서처럼 세계 조화가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의 마주섬이 당초부터 그리스도교의 바탕을 규정하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거룩하신 하느님과 죄스러운 인간의 대면의 종교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믿음을 통해 상호소통의 종교가 된다. (63)
구약 성서 윤리의 특징은 그러므로 새로운 윤리적 규범들의 창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래된 규범들이 그것들을 정당화하고 수호하시는 야훼의 권위와 계약에 뿌리박게 한 데 있다. 기존 윤리를 하느님과의 새로운 관계에 끌어들임에 있다. 이러한 신율은 윤리적 규범들의 자율적 발전을 전제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새로운 길로 나아가게 한다. ... 그러므로 하느님 자신이 참된 인간성의 변호자시다! 인간의 경험과 그것에 대한 판단에 터하여 자율적으로 생겨난 규범들이 토라 안에서 비인격적 율법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의 요구로 나타난다. 과연 십계명은 인간들의 인간다움을 위한 기본적 정언명령이다. (66)
2. 예수 추종
예수는 이스라엘 하느님의 일을 자신의 일로 삼았다. 이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뜻을 예수는 인간의 구원을 겨냥하며 앞서서 선포하고자 했다. 그래서 예수가 요구한 것은 그저 하느님 계명 준수의 갱신 정도가 아니라 사랑이었다. (68) 그는 정치적, 종교적 기성 권력체제와 충돌했으나(사제도 신학자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정치적 혁명가도 아니었다(오히려 폭력 포기의 설교자였다). 외면적이거나 내면적인 떠남(탈속)의 주창자도 아니었고(금욕고행자나 쿰란 수도자가 아니었다), 경건한 결의론자도 아니었다("계명에의 기쁨"으로 충만한 바리사이가 아니었다). 그런만큼 이 나자렛 사람은 인도의 신비주의 전통과 중국의 깨달음의 전통의 위대한 대표자들(붓다와 공자 등)과 다를 뿐 아니라, 근동 셈족에서 기원하는 다른 두 종교의 대표자들(모세와 무함마드)과도 다르다. 예수는 전혀 걸림없고 열정적인 대예언자적 인물이었다. (69)
십자가의 의미는 바로 모든 가치의 전도다. 그러나 이것은 목사의 아들 니체가 어려서부터 전해 받았음이 분명한 "순종하는 태도"(글자 그대로는 "십자가를 향해 기어감")와 같은 유약한 자기비하나 뒤틀린 마음자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가치의 전도란 오히려 치명적인 위험 앞에서도 두려움 없는 씩씩한 일상의 삶, 어찌해도 피할 수 없는 투쟁과 온갖 괴로움, 아니 죽음조차도 꿰뚫고 나가는 삶을 살아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삶은 흔들리지 않는 신뢰("믿음")와 참된 자유, 사랑, 인간다움 그리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이라는 목표에 대한 희망에 터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치욕스러운 걸림돌이 곧장 놀라운 구원의 체험이 되었고, 십자가의 길은 씩씩하게 걸어갈 수 있는 생명의 길이 되었다. (73-74) 이로써 그리스도교를 유다교뿐 아니라 다른 모든 종교 및 인본주의와 구별해주는 것이 명백히 규정되었다. 그리스도교를 구별해주는 것은 바로 십자가에 처형당했으나 그런데도 살아 있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공허한 신조나 교리정식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75)
이러한 관점에서 이제 그리스도교는 참으로 철저한 인본주의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 실존은 인간 실존을 온전히 포괄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인본주의라는 낱말 앞에서 접촉, 오염 공포 따위를 느낄 까닭이 없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철저한 인본주의를 대변, 대표, 옹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토록 이율배반적인 인간의 삶과 저토록 갈등 가득한 사회 안에서, 이상주의적 신(新)인본주의가 말했던 모든 진,선,미와 인간다운 것을 긍정하기만 할 뿐 아니라, 이에 못지않게 현실적으로 온갖 위, 악, 추와 비인간적인 것에 대결하기도 감행한다. 그렇게, 바로 그렇게만 이 세상 삶 안에서 참된 행복도 얻어 가질 수 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묘하게 만들어낸 끝내주는 체험이나 끊임없이 갈구되는 절정감을 통해서가 아니라, 곤경과 영혼의 나락 안에서도 견지되는, 현실의 삶에 대한 만족에 터한 근원적인 행복감을 통해. (78)
수많은 사람이 삶의 방향 설정을 갈망하고 있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한 분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이 물음에 답을 제공한다. 수많은 사람이 인생길의 이정표를 갈망하고 있다. 우리는 무엇에 의지해야 할까? 한 분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이 물음에 답을 제공한다. 수많은 사람이 삶의 용기와 기쁨을 갈망하고 있다. 우리는 어디서 그 힘을 얻을 수 있을까? 성령에 대한 믿음이 이 물음에 답을 제공한다. (62)
1. 한 분 하느님에 대한 믿음
그리스도교는 전형적인 예언자적 종교다. 구원 사건에서 결정적 주도권이 하느님께 있으며, 인간은 본성적으로 그분과 같을 수 없고 인간적 노력을 통해 같아질 수도 없다. 이 말이 뜻하는 것, 인동 종교에서처럼 합일의 신비나 중국 종교에서처럼 세계 조화가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의 마주섬이 당초부터 그리스도교의 바탕을 규정하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거룩하신 하느님과 죄스러운 인간의 대면의 종교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믿음을 통해 상호소통의 종교가 된다. (63)
구약 성서 윤리의 특징은 그러므로 새로운 윤리적 규범들의 창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래된 규범들이 그것들을 정당화하고 수호하시는 야훼의 권위와 계약에 뿌리박게 한 데 있다. 기존 윤리를 하느님과의 새로운 관계에 끌어들임에 있다. 이러한 신율은 윤리적 규범들의 자율적 발전을 전제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새로운 길로 나아가게 한다. ... 그러므로 하느님 자신이 참된 인간성의 변호자시다! 인간의 경험과 그것에 대한 판단에 터하여 자율적으로 생겨난 규범들이 토라 안에서 비인격적 율법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의 요구로 나타난다. 과연 십계명은 인간들의 인간다움을 위한 기본적 정언명령이다. (66)
2. 예수 추종
예수는 이스라엘 하느님의 일을 자신의 일로 삼았다. 이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뜻을 예수는 인간의 구원을 겨냥하며 앞서서 선포하고자 했다. 그래서 예수가 요구한 것은 그저 하느님 계명 준수의 갱신 정도가 아니라 사랑이었다. (68) 그는 정치적, 종교적 기성 권력체제와 충돌했으나(사제도 신학자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정치적 혁명가도 아니었다(오히려 폭력 포기의 설교자였다). 외면적이거나 내면적인 떠남(탈속)의 주창자도 아니었고(금욕고행자나 쿰란 수도자가 아니었다), 경건한 결의론자도 아니었다("계명에의 기쁨"으로 충만한 바리사이가 아니었다). 그런만큼 이 나자렛 사람은 인도의 신비주의 전통과 중국의 깨달음의 전통의 위대한 대표자들(붓다와 공자 등)과 다를 뿐 아니라, 근동 셈족에서 기원하는 다른 두 종교의 대표자들(모세와 무함마드)과도 다르다. 예수는 전혀 걸림없고 열정적인 대예언자적 인물이었다. (69)
십자가의 의미는 바로 모든 가치의 전도다. 그러나 이것은 목사의 아들 니체가 어려서부터 전해 받았음이 분명한 "순종하는 태도"(글자 그대로는 "십자가를 향해 기어감")와 같은 유약한 자기비하나 뒤틀린 마음자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가치의 전도란 오히려 치명적인 위험 앞에서도 두려움 없는 씩씩한 일상의 삶, 어찌해도 피할 수 없는 투쟁과 온갖 괴로움, 아니 죽음조차도 꿰뚫고 나가는 삶을 살아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삶은 흔들리지 않는 신뢰("믿음")와 참된 자유, 사랑, 인간다움 그리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이라는 목표에 대한 희망에 터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치욕스러운 걸림돌이 곧장 놀라운 구원의 체험이 되었고, 십자가의 길은 씩씩하게 걸어갈 수 있는 생명의 길이 되었다. (73-74) 이로써 그리스도교를 유다교뿐 아니라 다른 모든 종교 및 인본주의와 구별해주는 것이 명백히 규정되었다. 그리스도교를 구별해주는 것은 바로 십자가에 처형당했으나 그런데도 살아 있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공허한 신조나 교리정식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75)
이러한 관점에서 이제 그리스도교는 참으로 철저한 인본주의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 실존은 인간 실존을 온전히 포괄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인본주의라는 낱말 앞에서 접촉, 오염 공포 따위를 느낄 까닭이 없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철저한 인본주의를 대변, 대표, 옹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토록 이율배반적인 인간의 삶과 저토록 갈등 가득한 사회 안에서, 이상주의적 신(新)인본주의가 말했던 모든 진,선,미와 인간다운 것을 긍정하기만 할 뿐 아니라, 이에 못지않게 현실적으로 온갖 위, 악, 추와 비인간적인 것에 대결하기도 감행한다. 그렇게, 바로 그렇게만 이 세상 삶 안에서 참된 행복도 얻어 가질 수 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묘하게 만들어낸 끝내주는 체험이나 끊임없이 갈구되는 절정감을 통해서가 아니라, 곤경과 영혼의 나락 안에서도 견지되는, 현실의 삶에 대한 만족에 터한 근원적인 행복감을 통해.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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