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원그리스도교의 유다계 묵시문학 패러다임
5. 최초의 심각한 충돌
베드로 : 이방인들에게로 향함
베드로는 예루살렘 "사도 공의회"(48년경)때까지는 어디까지나 열두 사도 동아리와 함께, 그 후에는 세 "기둥"(야고보, 베드로, 요한)으로 존경받던 동료들과 함께 예루살렘 원공동체의 지도권을 보유하고 있었다. 예루살렘의 베드로는 바울의 이방인 선교에 매우 우호적이던 관용적 유다계 그리스도교의 한 대표자로 나타난다. ... 베드로는 유다인 가운데서 율법을 준수하는 선교를 추진했고, 그 결과 로마제국 여러 곳에 유다계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이 생겨났다 (129)
야고보 : 유다교 회당과의 연결
초창기 그리스도교계의 중심지와 모(母)교회는 로마가 아니라 예루살렘이다. 늦어도 사도 공의회 이후 특히 베드로가 딴 데로 떠난 후, 예루살렘에서는 다른 사람이 갈수록 중심인물로 부각되었으니, 곧 "주님의 아우" 야고보였다. ... 야고보는 사도 공의회에서 도량을 발휘하여 바울과 타협을 이끌어냈다. 예수를 믿는 이방인들은 유다교 의식 율법의 구속을 받지 않으나 예수를 믿는 유다인들은 반드시 율법을 엄수하기로. 유다계 그리스도인과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은 같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아가야 했고, 또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조상 전래의 회당에 계속 속해 있을 수 있어야 했다. (131) 지도자 야고보와 그와 가깝던 사람들의 처형(62년~64년)은 원공동체가 "다시는 회복될 수 없게 만든 ... 재앙"이었다. 앞에 말한 박해는 어린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유다교 당국의 관계에 치명적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유다교 회당 간의 결정적 분열이었다. (132)
요한계 공동체 : 회당에 의한 파문
예수 믿음과 회당 소속은 양립할 수 없었다. 전에는 이 두 가지가 조화될 수 있어야 했지만, 이제 그러한 조화는 예수와 예수 공동체에 대한 회당의 끊임없는 배척 때문에 끝장이 났다. 그리하여 결국 요한의 공동체는 메시아 예수에 대한 회당의 배척에 자기들 또한 배척으로 맞섰다. 회당을 거슬러 요한 공동체는 세상의 빛이요 착한 목자이신 예수에게 온전히 집중된, 새 시대의 정신적, 영적으로 심화된 새로운 공동체로 자처했다. ... 과연 예수는 성전과 율법을 대신하는 존재였다. ... 그러한 그리스도론적 언명들은 정통 유다교에게는 명백한 신성모독으로 여겨졌다. 그러한 비난은 복음서에 뚜렷이 반영되거니와 거기서 관건이 되는 것은 율법과의 이러저런 충돌 따위가 아니라, 예수와 하느님의 동일화다. (134)
요한계 문헌들의 핵심은 동떨어져 그 자체로 옹근 시원론도 영원으로부터 존재하는 신적 존재에 관한 사변도, 인간 예수가 시간적 의미로 선재한다는 가정도 아니고, 믿음에 터한 다음과 같은 근본 언명이다. '이 세상에서의' 예수의 현존은 하느님의 주도에 힘입고 있다. ... 요한복음은 선재하는 그리스도의 형이상학적 본질과 존재를 묻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육화 전 한 신적 본질 안에 결합되어 있었다는 두 신적 위격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아니다. 그러한 표상틀은 요한에게 낯설다. '신재재적 출산'이라는 표상 역시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137) 유다계 그리스도인인 요한의 그리스도론은 아직 온전히 당시 유다교의 이해지평 안에 머물로 있다. 그것은 근원적으로 유다계 그리스도교 패러다임의 한 부분이다. (138)
예수와의 연속성 : 유다인 바울의 믿음
바울은 예수의 선포를 동질변형시키기는 했지만, 새로운 체계를 만들어내거나 새로운 "신앙 알맹이"를 꾸며내지는 않았다. 유다인으로서, 그 자신의 말마따나 하느님이 단 한 번 결정적으로 놓으신 저 기초 곧 예수 그리스도 위에 계속 쌓아 올렸을 따름이다. (139) 요컨대 본격적 의미의 선재 그리스도론이나 나아가 "셋-하나 하느님"은 요한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에게서도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바울의 그리스도 중심성은 단호한 하느님 중심성에 바탕하며, 또한 그 안에서 정점에 이른다. 바울의 사고 도식은 아버지, 아들, 영의 동등화가 아니라, 하느님을 인간에게 향하게 함이다. "하느님께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 안에서." 그리고 인간을 하느님께 향하게 함이다.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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