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전, 미국선교사와 한국근대교육 : 갈등.. by 그루터기











 이성전 지음,  서정민, 가미야마 미나코 옮김,  미국선교사와 한국 근대교육,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7.



장로교 선교부의 미션스쿨 폐교에 대한 여러 문제는 역사적으로 어떻게 총괄되는가? 이미 앞 장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제국의 최종전쟁(제2차 세계대전)에 앞서 "신교(信敎)의 자유"를 둘러싸고 미국형 근대와 일본형 근대가 식민지를 무대로 해서 심하게 충돌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 분명하게 선교사는 15년 이후의 [개정사립학교규칙]을 계기로 하여 사립학교에서의 종교교육의 자유를 둘러싼 문제가 3.1운동 후에 사이토 마코토의 등장으로 인하여 양보가 생겼다고 이해하고 있었다. 마치 상극과 융합 사이에서 꼼짝할 수 없는 상태 가운데에 총독부와 미국인 선교사의 공범적 제휴가 가능한 1920년대 양자의 밀월시대가 존재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 장로교 미션스쿨 8개 학교의 지정학교화 정책은 사립학교로서의 종교교육의 자유 획득이라는 점에서, 미션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총독부에 대한 부분적 승리라고 말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지정학교화는 미션스쿨의 더 큰 식민지 교육으로의 편입이라는 총독부 쪽의 부분적 승리이기도 했다. (276쪽) ... 1935년부터 미션스쿨의 신사참배 문제는 (평양과 서울의) 대립구도를 예전보다 더 심각하게 만들어 버렸다. 결과적으로 평양의 "삼숭"은 선교사가 조선인에게 학교명을 양도할 수 있는 기회조차 없이 폐교되고 말았다. 이에 대해 언더우드 등은 조선인들을 위하여 어떤 수단이든 동원하여 서울에 있는 학교의 계속적 운영을 주장하였고 그 결과 경신학교는 조선인의 경영으로 이행될 수 있었다. 이 대립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는 ... 해외 선교에 대한 논쟁으로 발전한 장로교의 내부 본쟁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그것은 '근본주의, 자유주의 논쟁'이라고 불려진다. (280쪽) 압제 하에서 신앙의 자유를 기초로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던 것은 사상과 신조의 자유, 내심의 자유라는 인권적 시각으로 볼 때, 조선의 근현대사 속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교육사의 관점으로 볼 때 ... 장로교 선교부의 철수는 총독부 교육을 상대화시킬 수 있었던 교육 공간의 완전한 소멸에 중대한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조선인의 동화 내지는 황민화를 기도하던 식민지 교육과의 전면적인 통합이라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동시에 미국형 근대가 식민지 조선에서 좌절된 것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다. 이러한 거듭된 구속 상태에서의 왜곡 혹은 굴절현상은 역사적 평가를 내림에 적지않게 곤란함을 느끼게 한다. 전진해도 지옥이요, 물러나도 지옥과도 같은 아포리아(aporia)적인 상태가 바로 당시의 조선 선교부가 경험할 수밖에 없었던 처지였다. (285쪽)

저자가 제기한 문제제기는 다음과 같다. "미국선교사가 조선에서 어떻게 교육에 힘썼는가, 어떻게 미션스쿨을 현지 상황을 감안해가면서 발전시키고 전개해 갔는가? 미국의 교육이 그 모델로 설정되었는데, 그것을 어떻게 선택적으로 현지에 뿌리내릴 수 있었는가? 또 어떻게 그것이 수용되어 갔는가? 이 선교사들이 주도한 미션스쿨을 통해서 심겨진 서양 근대가 일본 제국지배, 혹은 총독부가 추진한 교육과 일본 통치하에서 어떠한 관계성을 갖게 되었는가?"(21쪽) 이러한 문제제기를 통해서 밝혀지는 역사를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한국근대사 안에서 발견되는 미국형 근대의 부식, 수용, 발전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서 근대 한국의 다양성을 뚜렷이 드러내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22쪽) 이러한 역사 이해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근대 한국의 교육은 조선 정부에 의해서 주도되지 못했고, 일제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되면서 교육 제도가 갖추어지기 이전부터 이미 개신교 선교에 의해 기초가 닦였지고 있었다. 초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학교들의 거의 대부분이 개신교 선교 사업의 일환으로 전국 각지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교회, 병원, 학교라는 저자의 표현으로 말하면 "트리니티" 선교사업의 결과였다. 이런 상황에서 일제가 조선을 병합하고 식민통치를 해 나가는 과정에서 교육에 있어서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다름아닌 선교사들의 활동임이 분명했다. 시기적으로 세분화하면 교육정책의 강약의 차이가 있겠지만 일제통치 후기로 가면서 "신도"의 강요로 인한 대립양상이 격해지게 되었는데, 이 양상은 "종교와 종교의 갈등"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일제도, 선교사도 서로를 더이상 용인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이 속에서 선교사들이 일제와 맺게되는 관계의 다양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을 저자는 "평양과 서울의 갈등"으로 정리하여 말하고 있다. 이러한 갈등 양상을 저자는 세계교회사 맥락으로 이어가서 해석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의 갈등"의 맥락이다. 그러나 보다 폭넓게 본다면 이러한 갈등 양상도 결국은 저자의 견해를 빌어 이야기 한다면 미국형 근대의 추진과정에서 나타난 입장의 차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평양이든 서울이든 개신교 선교사업의 한 축이었던 교육사업은 일제와의 대결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미국형 근대가 자리잡을 수 없었던 한국의 구조적인 한계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한계 속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역사의 굴절과 왜곡현상을 지적했다. 신앙의 자유를 지켜내며 기독교 신앙을 유지했고 또한 인권적인 측면에서도 저항의 역사를 남긴 긍정성을 말하면서 동시에 교육에 있어서 총독부 교육을 상대화시킬 수 있는 교육공간의 완전한 소멸과 함께 식민지 교육과의 전면적 통합이라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는 부정성을 동시에 지적한 것이다. 저자의 말 그대로 "전진해도 지옥이요, 물로나도 지옥과도 같은 아포리아적인 상태"였다. 

이 연구와 함께 안종철의 "미국북장로교 선교사들의 활동과 한미관계" 를 읽으면 당시대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될 듯하다. 후자의 연구는 자세하고 세심하며 보편적인 역사실증을 통해 구체적인 역사현장을 재현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말미에 이런 추기(追記)를 달았다. "앞으로의 연구에서는 근대 조선에서의 미션스쿨이 조선인들에게 어떤 교육공간이었는지, 또는 식민지 하에서 일본의 제국 지배를 상대화하는 공간으로서 어떻게 기능할 수 있었는지를 규명하는 것이 필요하다"(291쪽). 이 부분에 있어 또 다른 연구가 나온다면 보다 당시대를 살아간 한국인들의 삶을 읽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제국주의 국가였던 미국과 일본, 그리고 그 제국주의 국가의 영향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야 했던 한국, 한국인들의 수동적이고 때로는 주체적이었던 근대화의 노정을 기독교와의 연결 속에서 읽어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