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덕, 이야기 교회사 : 디딤돌 by 그루터기











이성덕,  이야기 교회사,  살림,  2007.


우리의 기독교회와 기독교 신앙은 역사의 과정 속에서 탄생하였으며,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역사적인 전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우리의 기독교적 정체성은 이러한 전통 속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기독교인에게는 이 전통을 잘 알아서 소중하게 생각하고 계승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통을 계승한다는 것이 단지 과거의 것을 그대로 오늘에 재현하는 것을 아닐 것입니다. 전통이라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과 전승을 각자의 시대에 맞게 소통 가능한 언어와 사상과 제도로 재해석하여 현재화하려는 치열한 노력 속에서 탄생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통의 올바른 계승이란 바로 이러한 정신을 우리의 시대에 맞게 창조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4-5쪽)

기독교가 역사적인 종교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가슴에 담아두는 것은 참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종교적 관심, 그것도 다분히 이데올로기적이거나 인간의 욕망에 지극히 충실한 것이라면 그것이 배태할 문제는 그리 간단하게 해결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의 기독교는 그 문제를 심각하게 앓고 있는 듯하다. 기독교가 역사적인 종교라는 것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절대절명의 확고한 권위를 가진 종교가 아니라 인간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좌충우돌하며 지독히도 종교적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 모순을 겪어내고 또 겪어내 왔던 종교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어찌보면 기독교의 역사성은 그 모순의 발견에 가장 큰 의미가 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이 책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그러한 역사적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접하기 위한 디딤돌과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제목에 충실하고자 한 책이다. 교양인들이라는 일반 독자들에게 - 물론 여기에는 기독교인들이 들어갈 것이다 - 역사적 종교로서 기독교가 어떠한 변천과정을 겪어 왔는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되는 성서와 또 다른 한 축으로 볼 수 있는 신조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을 표현해 왔던 절기와 예식, 또한 기독교 공동체의 실체적 모습들을 각각의 주제로 뽑아내어 이에 대한 뿌리 깊은 시대적 배경을 일련의 시간 순으로 이야기한다. 그리하여 성서의 내용을 기초로 삼고, 초대교회와 중세교회를 거쳐 종교개혁가들의 이야기를 중심적으로 들려주면서 현재의 모습에 대한 반성적 검토에까지 이르게 도와준다. 역시 중심은 기독교 자체의 모습이고, 그 중에서도 프로테스탄트의 입장이 대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말하는 것은 여기서 한층 더 나아갈 필요도 있겠다. 교회라는 제도적 실체, 신앙 공동체로서의 실존은 교회 자체의 시대적 변천사 속에서만 존재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교리라는 것은 교회내에서만 치열한 논쟁을 거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긴밀한 영향력 속에서 이루어졌고, 이러한 뿌리깊은 배경은 교회를 교리를 뛰어넘어 서구의 정치, 문화적 형태 자체를 기독교적 양상을 보이도록 만들어 버렸다. 종교가 드러나는 지점, 종교의 역사성은 따라서 보다 포괄적으로 바라봐야 함이 마땅하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기독교의 역사성은 종교 내부를 벗어나 있는 곳을 좀 더 심층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이 책을 비판하기에는 '기독교'에 대한 일련의 시대적 변천사 이해의 필요성이라는 측면을 간과할 수 없을 것 같다. 기독교의 역사성이라는 의미를 보수적, 획일적, 고정적인 전통의 느낌에서 벗어나게 도와주는 것으로도 적극적으로 이 이야기의 의미를 찾아볼 수 있겠다. 그래서 디딤돌이다.




파커 J. 파머, 가르칠 수 있는 용기 : 용기 by 그루터기













  파커 J. 파머 지음, 가르칠 수 있는 용기,  한문화,  2009 (증보판 2쇄)


내가 이 책에서 탐구하려고 하는 영역은 가르치는 자아의 내면 풍경이다. 이 풍경의 지도를 잘 작성하려면 지성, 감성, 영성의 3대 노선을 취해야 하며 그 중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교육을 지성으로 축소해버리면, 그것은 차가운 추상적인 개념이 되고 만다. 반면 감성으로만 다룬다면 나르시스적인 감상주의가 되고 만다. 영성으로만 접근한다면 이 세상과의 연결을 잃어버리게 된다. 따라서 지성, 감성, 영성이 혼연일체가 되어야만 바람직한 전체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이 세 가지는 인간의 자아와 교육에서 가장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나는 지성, 감성, 영성을 이 책속에 긴밀히 엮어 넣으려고 한다. 지성은 가르침과 배움에 대한 우리의 사고방식을 뜻한다. 사람들이 알고 배우는 방법에 대한 개념, 학생과 학과의 본질에 대한 개념의 구체적인 내용과 형태를 뜻한다. 감성은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에서 우리와 학생들이 느끼는 방식을 말한다. 교사와 학생 간의 교감을 증진시키기도 하고 위축시키기도 하는 그런 느낌을 뜻한다. 영성은 삶의 장엄함에 연결되려는 가슴 속 동경이 다양하게 표현되는 방식을 뜻한다. 사랑과 노동을 촉진시키는 동경, 특히 가르침이라는 노동을 촉진시키는 동경을 뜻한다. ... 이러한 영혼의 친교를 위한 내면의 탐구는 동시에 외부적인 관계로 나아가는 탐구가 된다. 우리의 영혼 속에 기거하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자기 집처럼 편한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39-40쪽)

Parker J. Palmer의 번역본 중에서 두 번째로 읽게 된 책이다. 가르침의 행위는 단순히 테크닉이라는 기술적인 차원에 국한될 수 있는 것이 아님에 분명하다. 테크닉이 득세할 때 생겨나는 현상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한다면 가르침의 현장에서 인격이 사라지고 대신 물질이 가득해 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곧, 지식의 거래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지식 거래의 도구로 전락한 가르침은 사람의 내면 깊숙히 파고들지 못한다. 이는 가르침의 현장에서 오고가는 감동이 줄고들고, 그에 따라 마음이 좀처럼 움직여지지 못한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사이의 철저한 분열이 남겨진다. 저자가 주목하는 지점은 따라서 현란한 테크닉이 아니라 테크닉 기저에서 발견해야만 하는 본질, 곧 교사의 내면세계이다. 가르칠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나는 곳은 테크닉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정체성 인식과 자신의 정체성에 성실할 수 있는 마음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면 세계 속에서 자아가 어딘가에 연결되고, 관계되고 있음을 자각하고, 그 상호성, 전체성에 스스로를 온전하게 위치시킬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서 비로소 독단적인 주체가 왜곡시키는 진리의 폭넓음, 속깊음을 겸손하게 발견할 수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가르침의 주제가 품고 있는 신비스러운 비밀이 그 스스로 열려지는 폭을 더 넓게 접할 수 있는 공간을 발견하게 한다는 의미 이겠다. 여기서 독단적 주체를 극복하는 상호성, 전체성의 연결망은 가르침의 현장에서 볼 때는 1차적으로 가르침의 주제를 중심에 두는 것이고, 2차적으로 그것을 둘러싼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그물망과 같은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역설이 설명된다. 주체의 독단성이 사라지나, 오히려 주체는 온전해 진다. 커뮤니티에 속하게 되나 개인이 절대 함몰되지 않는다.

그러나 두렵다. 익숙한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디서나 주체는 독단적이고 싶어한다. 진리의 폭을 제한하여 소유하고자 한다. 그것이 실상은 진리를 고스란히 망가뜨리고 진리와 분열되어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손에 쥐고 있는 듯한 착각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이 손을 놓아버리면 허물어질 것 같고, 불편하며, 무엇보다 이러한 분열이 현실적으로 공고하게 제도화되어 있는 실존의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리어 이상태가 실존의 가장 큰 위협을 겪어내고 있는 상황임은 자각하지 못한다. 그래서 용기가 필요하다. 이를 마주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편안한 분열되신 불편한 온전함을 향해 꿋꿋하게 걸어가겠다는 용기이다. 곧 불편한 온전함에서 다가오는, 이전의 편안한 분열을 상쇄하고 채우고도 넘쳐날 만큼의 보람을 누릴 수 있다는 용기이다. 이렇게 용기를 내고자 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공동체, 커뮤니티를 이루어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꿈은 현실의 다른 말이 될 수 있다. 





아낌이 필요할 때.. by 그루터기

극과 극은 가장 멀어 보이지만 가장 가까운 거리에 놓여 있는 듯하다..
동전의 앞면과 뒷면은 절대로 만날 수 없지만 어찌보면 이미 하나를 이루고 있듯..

사실 내가 비판의 화살을 가장 아낌없이 던지는 대상을 향해 내가 던지는 비판이..
비록 내용적 차이는 어느정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내가 비판하는 대상이 취하는 현상적인 모습과 똑 닮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은 분명 아닌 듯하다.. 

잠시 말을 아껴야 할 듯하다..




법과 권력.. by 그루터기

전문 법률 교육을 받지 못한 평신도들 그리고 주교들까지 포함한 많은 성직자들도 이미 오래 전부터 교회의 법률을 제대로 다룰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국가가 주로 로마법, 황제법을 고수하는 전문적인 "법률가들"이 필요했던 것처럼, 교회 영역에서도 11세기부터 전문적인 "교회법 학자들"이 필요했는데, 전적으로 교황의 법령들에 바탕을 두고 있었던 이들은 이제 로마에서분 아니라 수많은 관청과 법정에서도 로마 체제의 극히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지주가 되었다. ... 교회법 선생들은 교황들의 많은 개별적 결정들을 모두 <그라티아누스 법령집>의 보완 혹은 수정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세월이 흐르면서 세 공식 법령집이 생겨났는데, 이것들이 <그라티아누스 법령집>과 합쳐져 옛 가톨릭 교회법전을 이루었다. 이것에 바탕을 두고 있는 오늘날의 가톨릭 교회법전은 교황의 감독 아래 완성되어 1917~18년에 간행되었으며, 2차 바티칸 공의회 후 약간 손질되어 1983년 새로이 간행되었다. 12세기 이래 대부분의 교황들에게 신학 지식보다는 법률 지식이 직책 담당의 주요 자격조건이었거니와 이러한 사정은 교황들이 동시대의 세속 지배자들에 비해 매우 귀중한 장점을 지내게 해주었다. 해박한 법률 지식을 동원하여 비로소 교황 군주정체는 법률적 기구와 인원들을 충분히 활용하며, 로마의 권리주장들을 현실화해나갔다. 

- 한스큉, 이종한 옮김,  그리스도교 - 본질과 역사, 분도출판사,  2005 (재쇄), 496쪽 - 

권력이 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은 부정할 수 없어 보인다. 과거에나 지금에나..
법을 다루는 사람들, 만드는 사람들도 그렇지만 그 법을 두고 이러쿵 저러쿵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의 집단은..
더더욱 권력과의 밀월관계를 중시하고 그래서 가장 보수적이면서도 변혁에 부정적이며 부패의 가능성이 농후한 곳이 아닐까..





패러다임 전환 : 표 1 by 그루터기


- 한스큉, 이종한 옮김,  그리스도교 - 본질과 역사, 분도출판사,  2005 (재쇄), 11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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