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 역사 (1) by 그루터기

다. 원그리스도교의 유다계 묵시문학 패러다임

1. 근본적 방향설정의 불가피성

진짜 중요한 것은 "경제사와 사회사, 구조사, '오래 지속되는 것', 변두리 인생들의 역사, 육체, 성, 상상(想像)의 역사 그리고 특히 심성의 역사에 대한 새로운 (주제에 적합한 방법론적) 통찰들이다. 이 새로운, 주제에 적합한 방법론적 통찰들은 특히 그리스도교 역사 서술에 풍성한 결실을 가져다줄 수 있다.  (104)

2. 원공동체

원공동체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 관점이 중요하다. 1) 이 역사는 로마인이나 그리스인 역사가 아니라, 팔레스티나 헬레니즘 문화권 안에 살던 토박이 유다인 역사다. 2) 대부분의 역사서술이 초점을 맞추는 상층계급의 역사가 아니라, 보통은 아무도 기록해주지 않는 하층계급 사람들(어부, 농부, 장인, 영세민 등)의 역사다. 3) 남자들만의 운동사가 아니라 여자들의 역사이기도 하다. (107)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초창기가 흠없고 완전했던 것은 아니다. 첫 그리스도인들에 관한 기록들은 대체로 양식화되고, "이념적으로" 채색되고, 선포를 목적으로 선별된 것들이다. (108) 사실을 말하면, 원공동체가 여러모로 끈끈한 형제애를 실천했지만, 전반적인 재산 포기 같은 것은 알지 못했다. 어떤 사회적 유토피아가 실현되었던 것이 아니라 일종의 "사회적 연대책임 공동체"가 실현되었다고 하겠다. (109)

아람어를 사용하던 예루살렘 원공동체의 정신적 지평 또는 "풍토"는 한마디로 특징지을 수 있으니, 곧 묵시문학적, 종말론적 지평이었다. 그들이 관심을 갖고 있던 것은 "위로부터", 하느님으로부터 올 미래였다. (110) 그리스도인 첫 세대의 이러한 종말 대망은 두 가지 방식으로 성취된 것처럼 보였으니, 곧 예수의 부활(고양)과 성령 체험이 그것이다. (111) 여기에 모든 그리스도론의 원천이 있다. 하느님은 전권을 지니고 다인 나라를 선포했던 예수를 십자가 죽음을 거슬러 부활을 통해 "주님과 그리스도로 삼으셨다". 아무튼 예수가 체포될 때 달아났던 제자들은 이제 베드로의 주도 아래 새로운 모임을 이루었다. 그것도 다시금 예루살렘에서. 하느님의 영이 쏟아부어진 오순절 사건에 대한 사도행전의 보도는 열광케 하는 종말론적 영에 관해 증언하거니와, 이 영 안에서 최초의 메시아 공동체가 탄생했다. (112) 과연 이제는 그분과 한편 되는 결단이 정녕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면 예수와 한편 되는 이 결단은 (당시 매우 절박하고 동시에 항구적인 의미를 지닌 문제였거니와) 유다교 공동체와의 결별, 유다 민족과의 절연을 뜻했던가? 결코 그렇지 않다. (113)

3. 그리스도교의 중심 - 어디까지나 유다교적으로 꼴지어진

유다계 그리스도인, 이 첫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모든 유다인과 마찬가지로 한 분 하느님께 대한 유다교 신앙을 간직했고, 거룩한 문서들을 굳게 받아들였으며, 율법을 준수했고, 성전예배에 참여하고 희생제사를 드리고 똑같은 시편과 찬가를 노래했다. (113) 다음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원공동체의 삶 전체, 그들의 생각뿐 아니라 실천, 예배, 축제 등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십자가에 처형되었으나 하느님에 의해 부활하신 예수를 에고돌고 있었다. 예수는 당시의 공식적 유다교와의 연속성 그리고 동시에 (종교적, 정치적 기성체제의 배척으로 인한) 비연속성의 체현이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에 관한 예수의 하느님 중심적 선포가 그리스도이신 예수에 관한 그리스도 중심적 선포로 바뀐 것은 극히 당연했다고 하겠다. 예수가 선포한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으로 바뀌었다. (114)

그리스도 신앙은 과연 원그리스도교적 패러다임의 테두리 안에서 새로운 공동체의 바탕이었다. 이 신앙의 공적 표현은 예수에 대한 "그리스도" 고백, 고양되신 분을 찬미하는 찬송가, "주님"이신 그리스도께 드리는 기도, 이제 고양되신 분의 말씀으로 간주되는 예언 그리고 그분 이름을 내세움이었다. (116) 사람들은 고유의 가입의례를 통해 자신들의 신앙을 공개적이고 명시적으로 표명함으로써 이 공동체에 속하게 되는데, 그것이 곧 세례로서, 새로운 신앙 공동체의 첫째 근본표지다. 세례 의식이 정식으로 "제정"된 적은 없지만, 어쨌든 세례 없는 그리스도교 초창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117)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무엇인가? 매우 중요한 요소로 공동 성찬례를 들 수 있다. (118) 예수를 특징짓는 것은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행해진 잔치 식사였다. 그런 식사를 하면서 모두가 도래하는 하느님 나라에 속해 있음을 축하했다. 그리고 이 잔치 식사에는, 이미 주어져 있는 은총과 용서의 표지로서, 착취당하고 차별받는 사람들 그리고 "세리들"과 "죄인들"도 배제되지 않았다. 예수는 새로운 의식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극적 순간에 오래된 의식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다. 오래된 상징 행위를 새로운 상징 말씀과 결합시켰다. 희생, 자기 생명을 내어줌이다. (119)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체험에 터하여 서로간에 그리고 예수와 새로운 친교와 연대를 이루었다. 이것은 감사와 믿음으로 예수를 기억하며 그분의 단 한 번의 영원한 생명의 희생의 힘에 동참하는 의식이었다. 이 식사는 아주 일찍부터 "주님의 성찬" 또는 바로 "감사제"로 불리었고, 세례에 이은 새로운 신앙 공동체의 둘째 근본표지가 되었다. (120)

종말이 곧 닥쳐오리라는 기대는 깨어져야 했다. 이미 여기서 원그리스도교의 실상을 간단히 복원하려는 시도는 필경 그릇된 길로 빠질 수밖에 없음이 드러난다. 임박한 하느님 나라를 대망하던 "종말시기"를 이어 교회의 "중간시기"가 시작되었다. 교회? 예수는 요컨대 교회라는 것을 원했던가? 이것은 수사학적 질문이 아니라 매우 심각한 질문이다. 특히 교회에 열심인 사람들에게. (121)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그 시작의 순간, 생명.. by 그루터기

1~2억 개의 정자 중 한 개가 난자를 만나 기적적으로 수정하는 순간 아기의 성별이 결정된다. X염색체만 있는 난자가 X염색체와 Y염색체를 가진 정자 중 어느 것과 수정하느냐에 따라 성별이 달라진다. 자궁에 착상한 수정란은 태낭을 형성하고, 빠른 속도로 세포분열을 반복하며 성장한다. 하지만 아직 사람의 형체는 갖추지 못해 '태아(胎兒)'가 아니라 '배아(胚芽)'라고 부른다. (21쪽)

임신 4주가 되면 심장이 생기고, 5주가 되면 손과 발의 작은 돌기와 뇌, 척추, 소화기관 등의 원형이 생긴다. 6주가 되면 머리와 몸체, 팔, 다리의 형태가 구별되고 눈, 코, 귀, 입 등의 윤곽과 손가락의 원형도 나타난다. 7주가 되면 손발이 자라고 손가락과 발가락이 보이기 시작한다. 심장이 뛰는 모습도 초음파로 보로 수 있다. 임신 7주의 태아의 크기 - 머리에서 엉덩이까지의 길이는 약 12mm, 체중은 약 4g (33쪽)

 - 야무진 임신 출산 10개월, 프리미엄 북스 -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그 시작의 순간, 생명의 모습! 사람의 형체를 갖추기 시작해서 머리와 몸, 팔, 다리의 형태가 구별되고 얼굴의 윤곽이 생겨나며 손가락, 발가락도 생겨나고, 속으로는 장기가 만들어진다는 데, 그 태아의 크기는 불과 1~2cm에 불과하다. 그런자그마한 태아가 자신의 심장을 힘차게 움직이며 살아있음의 몸짓을 강렬하게 전한다. 눈앞에 드러나는 그 몸짓은 생물시간에 배웠던 지식, 단편적인 과학적 사실만으로는 온전하게 품어내어 전체를 오롯이 드러내기가 불가능한 생명의 신비로움이다. 두근거림의 힘찬 물결이 단순한 서술을 뛰어넘은 삶을 가져온다. 잊고 지낸 생명의 힘이다.




의존하되 의존하지 않는 자아의식.. by 그루터기

우리는 머리와 가슴을 분리한다. 그 결과 머리는 느끼는 방법을 모르고 가슴은 생각하는 방법을 모른다.
우리는 사실과 느낌을 분리한다. 그 결과 생기없는 사실은 이 세상을 막연한 어떤 곳으로 만들고,
                                            무지한 느낌은 진리를 오늘의 느낌 수준으로 격하시킨다.
우리는 이론과 실천을 분리한다. 그 결과 이론은 생활과 별반 관계가 없고, 실천은 이해가 따르지 못한다.
우리는 가르침과 배움을 분리한다. 그 결과 교사들은 발언만 할 뿐 들으려 하지 않고, 학생들은 듣기만 할 뿐 말하려 하지 않는다.

역설적 사고방식은 우리에게 양극이 조화를 이루는 세계관을 수용하라고 요구한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이 세상을 좀더 분명하게 전체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은 차돌 같은 리얼리즘이나 이슬 같은 낭만주의 중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지 않다. 오히려 그 둘을 창조적으로 종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39쪽) 더 훌륭한 교사가 되려면,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의존하고, '그리고' 의존하지 않는 자아의식을 배양해야만 한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역설인 것이다. 이 교훈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 나는 나 자신의 본성 속으로 고독한 여행을 떠나야 하고,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보기 위해 남들의 도움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면적 영역에 풍성하게 존재하는 수많은 역설들 중 하나일 뿐이다. (150쪽)

- Paker J. Palmer.  가르칠 수 있는 용기,  한문화,  2009 (증보판 2쇄) - 

의존하되 의존하지 않는 자아의식이 필요한 시점이다..


 


오만과 편견 :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몸짓.. by 그루터기


#.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몸짓에의 감동

"엘리자베스 베넷"이 "콜린스"와 결혼한 "샤롤렛"을 방문했을 때..
거기에서 베넷은 다시 "다아시"와 재회하게 된다..
콜린스가 집례하는 예배 도중에 다아시에 대한 뒷이야기를 듣고..
베넷은 
예배를 뛰쳐나가고 다아시가 그 뒤를 따라갔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배경을 뒤로 하고
흠뻑 젖은 두 주인공이 격렬하게 이야기한다..
베넷은 자신의 본심을 감추고 편견에 빠진 자신의 견해를..
다아시는 오만함으로 스스로를 억누른 자신의 사랑의 감정을..

영어 원문을 올리지 못해 아쉽지만 번역된 대사를 올려본다..
이 대사는 처음으로 그들의 사랑을 격렬한 언어의 몸짓으로..
간절하게 표현했던 그 장면의 거의 마지막 부분,
엘리자베스 베넷의 대사다..

"당신의 오만과 자만심 당신의 이기심을 경멸해요.
 
 다른사람에 대한 당신의 태도도..
 당신이 이세상에 마지막남은 남자라고 할지라도..
 절대 절대 당신과 결혼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이 장면의 묘미는 이 말을 한 다음 장면에 있다..
이말을 하고난 뒤 둘은 아주 묘하게 입맞춤의 순간으로 다가간다..
이 어찌 역설적인 장면이 아닐까..

이게 사랑의 감정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인간의 언어로 다할 수 없고 풀어낼 수 없는..
머리와 몸이 어쩌면 따로 존재하는..
뜨거운 가슴이 합리적 이성을 넘어버리려는 그 경계선..
이미 그들은 사랑에 빠졌다..

다른 많은 대사들이 있었지만 이 부분, 바로 이 묘한 이 장면, 이 대사, 이 몸짓에서..
그만 나는 할 말을 잊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순간..

사랑..
맞다..
사랑..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준 그 강렬했던 그 느낌..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그 느낌..그 몸짓..




유식한 무지자가 되어라.. by 그루터기

보나벤투라의 "하나님께 나아가는 영혼의 순례" 7단계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께 올라가는 상승단계와 우주 안에 나타난 그 분의 자취를 통하여(Through) 하나님을 정관한다. 
2. 이 감관적 세계 안에 (In)있는 그 분의 자취에서 하나님을 정관한다.
3. 자연적 능력에 각인된 하나님의 형상(모든 인간을 의미한다)을 통하여 하나님을 정관한다.
4. 값 없이 주시는 갱신된 하나님의 형상(구원받은 인간을 의미한다) 안에서 하나님을 정관한다.
5. 신적 통일에 첫째 이름인 존재를 통하여 신적 통일을 정관한다. (하나님 존재 자체로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6. 성 삼위일체의 이름인 선(善) 안에서 성 삼위일체를 정관한다. 
7. 영혼의 신비적 무아경에서 지성은 안식에 이르고 심정은 신비적 무아경을 통하여 전적으로 하나님 안으로 들어간다.

우리의 정신은 하나님을 인식한 후에 - 자기 밖에서는 흔적을 통하여, 그리고 흔적 안에서 인식하고, 자기 안에서는 형상을 통하여, 그리고 형상 안에서 인식하며, 자기 위에서는 우리를 비추는 신적인 빛의 모습을 통하여, 그리고 순례 상태에서 우리 영혼의 노력을 가능하게 해 주는 빛 자체 안에서 인식한다 - 우리의 정신은 여섯째 단계에 이르러 최고의 원리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 이성의 온갖 총명을 넘어 있는 것과 피조물 안에서는 그와 비슷한 것을 결코 발견할 수 없는 것을 정관하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 정신은 이제 이것을 바라보면서 그 위로 올라가는 일만이 남아 있다. 그것은 이 감관적 세계만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도 넘어서는 것이다. (83-84쪽)

그곳에는 신학의 새롭고 절대적이고 불변적인 신비가 저 가장 깊은 흑암 속에서 신비스럽고 유익한 침묵의 초월적으로 비추는 어두움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신비는 초월적으로 가장 명백하고 초월적으로 가장 잘 비추고 있습니다. 이 어두움 속에서 모든 것이 반사되고 보이지 않는 정신들을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선의 광휘로써 넘치도록 채워줍니다. ... 그대 친구여, 신비적 비추임의 길로 곧장 정정당당하게 걸어 나가라. 감관과 오성적 활동,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모든 비존재자와 존재자를 떠나서, 가능하다면 무지자(無知者)로서 모든 것을 저 본질과 모든 학문 위에 계신 분의 통일성에로 환원시키라. 즉 그대 자신과 만물 너머의 불가사의한 절대적 정신적 무아경으로 올라가 모든 것을 떠나고 모든 것으로부터 풀려나온 후에 그대는 신적인 어두움의 초본질적 명백성에로까지 올라가게 될 것이다. 만일 그대가 이것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고자 하면, 은혜에 묻히고 학문에 묻히지 말라. 열망에 묻히고 오성에 묻히지 말라. 기도의 탄식에 묻히고 연구하는 독서에 묻히지 말라. (86-89쪽)

-  보나벤투라, 김광식 역,  하나님과 하나되어 (현대신서 11),  대한기독교서회, 1982 -


학문에 묻히지 말고, 오성에 묻히지 말고, 연구하는 독서에 묻히지 말라는 보나벤투라의 말..
말 그대로 이해하기에는 오해의 소지가 다분합니다..
사실 보나벤투라는 신학 공부를 상당히 많이 한 분이었습니다..
신학 공부를 많이 하고 나서 이렇게 한 말이었지요..
결국 유식한 무지자가 되라는 말입니다..

중세교회사 세미나 중 내가 이해한 내용으로 적어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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