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몸짓에의 감동
"엘리자베스 베넷"이 "콜린스"와 결혼한 "샤롤렛"을 방문했을 때..
거기에서 베넷은 다시 "다아시"와 재회하게 된다..
콜린스가 집례하는 예배 도중에 다아시에 대한 뒷이야기를 듣고..
베넷은 예배를 뛰쳐나가고 다아시가 그 뒤를 따라갔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배경을 뒤로 하고 흠뻑 젖은 두 주인공이 격렬하게 이야기한다..
베넷은 자신의 본심을 감추고 편견에 빠진 자신의 견해를..
다아시는 오만함으로 스스로를 억누른 자신의 사랑의 감정을..
영어 원문을 올리지 못해 아쉽지만 번역된 대사를 올려본다..
이 대사는 처음으로 그들의 사랑을 격렬한 언어의 몸짓으로..
간절하게 표현했던 그 장면의 거의 마지막 부분, 엘리자베스 베넷의 대사다..
"당신의 오만과 자만심 당신의 이기심을 경멸해요.
다른사람에 대한 당신의 태도도..
당신이 이세상에 마지막남은 남자라고 할지라도..
절대 절대 당신과 결혼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이 장면의 묘미는 이 말을 한 다음 장면에 있다..
이말을 하고난 뒤 둘은 아주 묘하게 입맞춤의 순간으로 다가간다..
이 어찌 역설적인 장면이 아닐까..
이게 사랑의 감정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인간의 언어로 다할 수 없고 풀어낼 수 없는..
머리와 몸이 어쩌면 따로 존재하는..
뜨거운 가슴이 합리적 이성을 넘어버리려는 그 경계선..
이미 그들은 사랑에 빠졌다..
다른 많은 대사들이 있었지만 이 부분, 바로 이 묘한 이 장면, 이 대사, 이 몸짓에서..
그만 나는 할 말을 잊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순간..
사랑..
맞다..
사랑..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준 그 강렬했던 그 느낌..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그 느낌..그 몸짓..
보나벤투라의 "하나님께 나아가는 영혼의 순례" 7단계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께 올라가는 상승단계와 우주 안에 나타난 그 분의 자취를 통하여(Through) 하나님을 정관한다.
2. 이 감관적 세계 안에 (In)있는 그 분의 자취에서 하나님을 정관한다.
3. 자연적 능력에 각인된 하나님의 형상(모든 인간을 의미한다)을 통하여 하나님을 정관한다.
4. 값 없이 주시는 갱신된 하나님의 형상(구원받은 인간을 의미한다) 안에서 하나님을 정관한다.
5. 신적 통일에 첫째 이름인 존재를 통하여 신적 통일을 정관한다. (하나님 존재 자체로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6. 성 삼위일체의 이름인 선(善) 안에서 성 삼위일체를 정관한다.
7. 영혼의 신비적 무아경에서 지성은 안식에 이르고 심정은 신비적 무아경을 통하여 전적으로 하나님 안으로 들어간다.
우리의 정신은 하나님을 인식한 후에 - 자기 밖에서는 흔적을 통하여, 그리고 흔적 안에서 인식하고, 자기 안에서는 형상을 통하여, 그리고 형상 안에서 인식하며, 자기 위에서는 우리를 비추는 신적인 빛의 모습을 통하여, 그리고 순례 상태에서 우리 영혼의 노력을 가능하게 해 주는 빛 자체 안에서 인식한다 - 우리의 정신은 여섯째 단계에 이르러 최고의 원리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 이성의 온갖 총명을 넘어 있는 것과 피조물 안에서는 그와 비슷한 것을 결코 발견할 수 없는 것을 정관하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 정신은 이제 이것을 바라보면서 그 위로 올라가는 일만이 남아 있다. 그것은 이 감관적 세계만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도 넘어서는 것이다. (83-84쪽)
그곳에는 신학의 새롭고 절대적이고 불변적인 신비가 저 가장 깊은 흑암 속에서 신비스럽고 유익한 침묵의 초월적으로 비추는 어두움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신비는 초월적으로 가장 명백하고 초월적으로 가장 잘 비추고 있습니다. 이 어두움 속에서 모든 것이 반사되고 보이지 않는 정신들을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선의 광휘로써 넘치도록 채워줍니다. ... 그대 친구여, 신비적 비추임의 길로 곧장 정정당당하게 걸어 나가라. 감관과 오성적 활동,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모든 비존재자와 존재자를 떠나서, 가능하다면 무지자(無知者)로서 모든 것을 저 본질과 모든 학문 위에 계신 분의 통일성에로 환원시키라. 즉 그대 자신과 만물 너머의 불가사의한 절대적 정신적 무아경으로 올라가 모든 것을 떠나고 모든 것으로부터 풀려나온 후에 그대는 신적인 어두움의 초본질적 명백성에로까지 올라가게 될 것이다. 만일 그대가 이것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고자 하면, 은혜에 묻히고 학문에 묻히지 말라. 열망에 묻히고 오성에 묻히지 말라. 기도의 탄식에 묻히고 연구하는 독서에 묻히지 말라. (86-89쪽)
학문에 묻히지 말고, 오성에 묻히지 말고, 연구하는 독서에 묻히지 말라는 보나벤투라의 말..
말 그대로 이해하기에는 오해의 소지가 다분합니다..
사실 보나벤투라는 신학 공부를 상당히 많이 한 분이었습니다..
신학 공부를 많이 하고 나서 이렇게 한 말이었지요..
결국 유식한 무지자가 되라는 말입니다..
중세교회사 세미나 중 내가 이해한 내용으로 적어보다..
1. 하나님께 올라가는 상승단계와 우주 안에 나타난 그 분의 자취를 통하여(Through) 하나님을 정관한다.
2. 이 감관적 세계 안에 (In)있는 그 분의 자취에서 하나님을 정관한다.
3. 자연적 능력에 각인된 하나님의 형상(모든 인간을 의미한다)을 통하여 하나님을 정관한다.
4. 값 없이 주시는 갱신된 하나님의 형상(구원받은 인간을 의미한다) 안에서 하나님을 정관한다.
5. 신적 통일에 첫째 이름인 존재를 통하여 신적 통일을 정관한다. (하나님 존재 자체로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6. 성 삼위일체의 이름인 선(善) 안에서 성 삼위일체를 정관한다.
7. 영혼의 신비적 무아경에서 지성은 안식에 이르고 심정은 신비적 무아경을 통하여 전적으로 하나님 안으로 들어간다.
우리의 정신은 하나님을 인식한 후에 - 자기 밖에서는 흔적을 통하여, 그리고 흔적 안에서 인식하고, 자기 안에서는 형상을 통하여, 그리고 형상 안에서 인식하며, 자기 위에서는 우리를 비추는 신적인 빛의 모습을 통하여, 그리고 순례 상태에서 우리 영혼의 노력을 가능하게 해 주는 빛 자체 안에서 인식한다 - 우리의 정신은 여섯째 단계에 이르러 최고의 원리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 이성의 온갖 총명을 넘어 있는 것과 피조물 안에서는 그와 비슷한 것을 결코 발견할 수 없는 것을 정관하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 정신은 이제 이것을 바라보면서 그 위로 올라가는 일만이 남아 있다. 그것은 이 감관적 세계만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도 넘어서는 것이다. (83-84쪽)
그곳에는 신학의 새롭고 절대적이고 불변적인 신비가 저 가장 깊은 흑암 속에서 신비스럽고 유익한 침묵의 초월적으로 비추는 어두움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신비는 초월적으로 가장 명백하고 초월적으로 가장 잘 비추고 있습니다. 이 어두움 속에서 모든 것이 반사되고 보이지 않는 정신들을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선의 광휘로써 넘치도록 채워줍니다. ... 그대 친구여, 신비적 비추임의 길로 곧장 정정당당하게 걸어 나가라. 감관과 오성적 활동,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모든 비존재자와 존재자를 떠나서, 가능하다면 무지자(無知者)로서 모든 것을 저 본질과 모든 학문 위에 계신 분의 통일성에로 환원시키라. 즉 그대 자신과 만물 너머의 불가사의한 절대적 정신적 무아경으로 올라가 모든 것을 떠나고 모든 것으로부터 풀려나온 후에 그대는 신적인 어두움의 초본질적 명백성에로까지 올라가게 될 것이다. 만일 그대가 이것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고자 하면, 은혜에 묻히고 학문에 묻히지 말라. 열망에 묻히고 오성에 묻히지 말라. 기도의 탄식에 묻히고 연구하는 독서에 묻히지 말라. (86-89쪽)
- 보나벤투라, 김광식 역, 하나님과 하나되어 (현대신서 11), 대한기독교서회, 1982 -
학문에 묻히지 말고, 오성에 묻히지 말고, 연구하는 독서에 묻히지 말라는 보나벤투라의 말..
말 그대로 이해하기에는 오해의 소지가 다분합니다..
사실 보나벤투라는 신학 공부를 상당히 많이 한 분이었습니다..
신학 공부를 많이 하고 나서 이렇게 한 말이었지요..
결국 유식한 무지자가 되라는 말입니다..
중세교회사 세미나 중 내가 이해한 내용으로 적어보다..
태그 : 보나벤투라
냐. 핵심적 구성요소들
3. 성령의 활동
신약성서에 의하면 성령은 하느님과는 별도의,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어떤 제3존재가 아니다. 성령은 바로 하느님 자신이다. 신약성서는 한 입으로 대답한다. 하느님은 영 안에서 우리 인간에게 가까이 계시다고. 그러면 그리스도는? 지금까지 말한 것을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하신 분의 인격에 적용시켜보자. 하느님이 거두어 들어높이신 예수 그리스도 역시 이제는 하느님의 존재, 활동 양식 안에 살아 계시다. 즉, 영을 통해, 영 안에서 그리고 영으로서 예수는 당신 공동체에 가까이 계실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은 하느님의 영이며, 하느님의 영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포착할 수 없고, 한정할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는 이 영은 그리스도교계 안에서뿐 아니라 삼라만상 어디서나 활동하신다. 온 세상에서 활동하신다. (79-80)
성령에 대한 바로 이러한 관점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교의 정체성 보존과 종교적 다원성의 인정, 다시 말해 그리스도에의 집중과 보편적 인간성의 결합을 가능하게 해준다. 이러한 개방적 마음가짐으로 그리스도인은 세상 곳곳에서 발견되는 인간다움, 연대, 신심을 긍정할 수 있다. 유다교와 이슬람교 안에서뿐 아니라, 인도와 중국에 기원을 둔 고등종교들, 자연종교들 그리고 온갖 종류의 종교적, 윤리적 집단들 안에서도.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인간다움, 연대, 신심을 처음부터 그리스도교를 위해 횡령하거나 무비판적으로 넘겨받지 말고 있는 그대로 긍정해야 한다. (83)
4. 무엇이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가?
그러면 왜 어떻게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되는가? 그것은 단순히 그 사람이 인간적이고 사회적이고 종교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인간성, 사회성, 종교성을 이 그리스도라는 척도와 그분 영의 이끄심을 따라, 형편이 좋건 나쁘건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내고자 노력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지금은 이것부터 묻기로 하자. 신앙고백이 그리스도인이 되는데 근본적으로 중요하지 않은가? (84) 원신앙고백(문)들은 현대적 의미의 교의들이 아니다. 신앙은 그러한 정식들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식들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신앙명제들은 공동체 신앙의 법률적 확증이 아니라 그 신앙의 자유로운 표현이다. (88) 그리스도인 실존을 위해 더 중요한 것은 다른 것이다. 예수는 어디서도 "내 말을 따라하시오"라 하지 않고 "내 뒤를 따르시오"라고 말했다. 그리스도교 윤리의 신약성서적 열쇠 개념은 그리스도 추종이다. (89) 그리스도교의 소식 전체가 겨냥하는 것은 특정한 결단, 행동, 동기, 계획만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삶의 자세다. 근본적으로 변화된 의식, 새로운 근본태도, 전혀 다른 가치척도, 철저한 사고전환, 통사람의 "회개"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교 윤리의 핵심인 "산상설교"가 말하는 것이다. (91)
한 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확고한 채로, 이를 테면 신앙의 중심이 새로이 규정되었다. 예수의 이름이 그가 도래를 선포했던 하느님 나라를 대체했다. 하느님 믿음이 이렇게 그리스도론적으로 구체화, 아니 인격화되었다.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한 분 하느님을 그분의 마지막 예언자요 메시아를 통해 새로이 보았고, 이 메시아 자신도 갈수록 더욱 새로이 이해하게 되었다. "하느님 중심성"이 "그리스도 중심성"에 의해 새로이 규정되었다. 하느님과 예수의 이 특별한 관계는 그리스도교의 근원적 개념이며 본질 규정적 결정화 핵이다. (98) 이 중심, 이 바탕, 이 신앙 알맹이는 물론 추상적으로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하는 요구들 안에서 언제나 다시금 새로이 해석되었고 또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다. 각 시대의 새로웁고 획기적인 총체적 상황은 그리스도교의 이 동일한 중심을 언제나 다시금 새로이 해석하고 구체화할 것이다. (99)
사랑의 이상은 그 얼마나 숭고한가 - 그러나 현실은 또 얼마나 참담한가! 지난 2천년간 그리스도교계는 그리스도의 이 초대, 호소, 요구들로부터 도대체 무엇을 이루어왔던가! 그리스도교의 본질과 중심, 핵심적 구성요소들과 중심인물에 관해 충분히 살펴본 지금, 우리는 한 책이 허용하는 테두리 안에서, 그리스도교의 역사, 지극히 이율배반적이고 때때로 단절되었던 역사와 대면해야 하겠다. (97)
3. 성령의 활동
신약성서에 의하면 성령은 하느님과는 별도의,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어떤 제3존재가 아니다. 성령은 바로 하느님 자신이다. 신약성서는 한 입으로 대답한다. 하느님은 영 안에서 우리 인간에게 가까이 계시다고. 그러면 그리스도는? 지금까지 말한 것을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하신 분의 인격에 적용시켜보자. 하느님이 거두어 들어높이신 예수 그리스도 역시 이제는 하느님의 존재, 활동 양식 안에 살아 계시다. 즉, 영을 통해, 영 안에서 그리고 영으로서 예수는 당신 공동체에 가까이 계실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은 하느님의 영이며, 하느님의 영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포착할 수 없고, 한정할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는 이 영은 그리스도교계 안에서뿐 아니라 삼라만상 어디서나 활동하신다. 온 세상에서 활동하신다. (79-80)
성령에 대한 바로 이러한 관점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교의 정체성 보존과 종교적 다원성의 인정, 다시 말해 그리스도에의 집중과 보편적 인간성의 결합을 가능하게 해준다. 이러한 개방적 마음가짐으로 그리스도인은 세상 곳곳에서 발견되는 인간다움, 연대, 신심을 긍정할 수 있다. 유다교와 이슬람교 안에서뿐 아니라, 인도와 중국에 기원을 둔 고등종교들, 자연종교들 그리고 온갖 종류의 종교적, 윤리적 집단들 안에서도.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인간다움, 연대, 신심을 처음부터 그리스도교를 위해 횡령하거나 무비판적으로 넘겨받지 말고 있는 그대로 긍정해야 한다. (83)
4. 무엇이 사람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가?
그러면 왜 어떻게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되는가? 그것은 단순히 그 사람이 인간적이고 사회적이고 종교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인간성, 사회성, 종교성을 이 그리스도라는 척도와 그분 영의 이끄심을 따라, 형편이 좋건 나쁘건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내고자 노력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지금은 이것부터 묻기로 하자. 신앙고백이 그리스도인이 되는데 근본적으로 중요하지 않은가? (84) 원신앙고백(문)들은 현대적 의미의 교의들이 아니다. 신앙은 그러한 정식들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식들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신앙명제들은 공동체 신앙의 법률적 확증이 아니라 그 신앙의 자유로운 표현이다. (88) 그리스도인 실존을 위해 더 중요한 것은 다른 것이다. 예수는 어디서도 "내 말을 따라하시오"라 하지 않고 "내 뒤를 따르시오"라고 말했다. 그리스도교 윤리의 신약성서적 열쇠 개념은 그리스도 추종이다. (89) 그리스도교의 소식 전체가 겨냥하는 것은 특정한 결단, 행동, 동기, 계획만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삶의 자세다. 근본적으로 변화된 의식, 새로운 근본태도, 전혀 다른 가치척도, 철저한 사고전환, 통사람의 "회개"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교 윤리의 핵심인 "산상설교"가 말하는 것이다. (91)
한 분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확고한 채로, 이를 테면 신앙의 중심이 새로이 규정되었다. 예수의 이름이 그가 도래를 선포했던 하느님 나라를 대체했다. 하느님 믿음이 이렇게 그리스도론적으로 구체화, 아니 인격화되었다.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한 분 하느님을 그분의 마지막 예언자요 메시아를 통해 새로이 보았고, 이 메시아 자신도 갈수록 더욱 새로이 이해하게 되었다. "하느님 중심성"이 "그리스도 중심성"에 의해 새로이 규정되었다. 하느님과 예수의 이 특별한 관계는 그리스도교의 근원적 개념이며 본질 규정적 결정화 핵이다. (98) 이 중심, 이 바탕, 이 신앙 알맹이는 물론 추상적으로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하는 요구들 안에서 언제나 다시금 새로이 해석되었고 또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다. 각 시대의 새로웁고 획기적인 총체적 상황은 그리스도교의 이 동일한 중심을 언제나 다시금 새로이 해석하고 구체화할 것이다. (99)
사랑의 이상은 그 얼마나 숭고한가 - 그러나 현실은 또 얼마나 참담한가! 지난 2천년간 그리스도교계는 그리스도의 이 초대, 호소, 요구들로부터 도대체 무엇을 이루어왔던가! 그리스도교의 본질과 중심, 핵심적 구성요소들과 중심인물에 관해 충분히 살펴본 지금, 우리는 한 책이 허용하는 테두리 안에서, 그리스도교의 역사, 지극히 이율배반적이고 때때로 단절되었던 역사와 대면해야 하겠다. (97)
냐. 핵심적 구성요소들
수많은 사람이 삶의 방향 설정을 갈망하고 있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한 분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이 물음에 답을 제공한다. 수많은 사람이 인생길의 이정표를 갈망하고 있다. 우리는 무엇에 의지해야 할까? 한 분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이 물음에 답을 제공한다. 수많은 사람이 삶의 용기와 기쁨을 갈망하고 있다. 우리는 어디서 그 힘을 얻을 수 있을까? 성령에 대한 믿음이 이 물음에 답을 제공한다. (62)
1. 한 분 하느님에 대한 믿음
그리스도교는 전형적인 예언자적 종교다. 구원 사건에서 결정적 주도권이 하느님께 있으며, 인간은 본성적으로 그분과 같을 수 없고 인간적 노력을 통해 같아질 수도 없다. 이 말이 뜻하는 것, 인동 종교에서처럼 합일의 신비나 중국 종교에서처럼 세계 조화가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의 마주섬이 당초부터 그리스도교의 바탕을 규정하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거룩하신 하느님과 죄스러운 인간의 대면의 종교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믿음을 통해 상호소통의 종교가 된다. (63)
구약 성서 윤리의 특징은 그러므로 새로운 윤리적 규범들의 창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래된 규범들이 그것들을 정당화하고 수호하시는 야훼의 권위와 계약에 뿌리박게 한 데 있다. 기존 윤리를 하느님과의 새로운 관계에 끌어들임에 있다. 이러한 신율은 윤리적 규범들의 자율적 발전을 전제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새로운 길로 나아가게 한다. ... 그러므로 하느님 자신이 참된 인간성의 변호자시다! 인간의 경험과 그것에 대한 판단에 터하여 자율적으로 생겨난 규범들이 토라 안에서 비인격적 율법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의 요구로 나타난다. 과연 십계명은 인간들의 인간다움을 위한 기본적 정언명령이다. (66)
2. 예수 추종
예수는 이스라엘 하느님의 일을 자신의 일로 삼았다. 이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뜻을 예수는 인간의 구원을 겨냥하며 앞서서 선포하고자 했다. 그래서 예수가 요구한 것은 그저 하느님 계명 준수의 갱신 정도가 아니라 사랑이었다. (68) 그는 정치적, 종교적 기성 권력체제와 충돌했으나(사제도 신학자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정치적 혁명가도 아니었다(오히려 폭력 포기의 설교자였다). 외면적이거나 내면적인 떠남(탈속)의 주창자도 아니었고(금욕고행자나 쿰란 수도자가 아니었다), 경건한 결의론자도 아니었다("계명에의 기쁨"으로 충만한 바리사이가 아니었다). 그런만큼 이 나자렛 사람은 인도의 신비주의 전통과 중국의 깨달음의 전통의 위대한 대표자들(붓다와 공자 등)과 다를 뿐 아니라, 근동 셈족에서 기원하는 다른 두 종교의 대표자들(모세와 무함마드)과도 다르다. 예수는 전혀 걸림없고 열정적인 대예언자적 인물이었다. (69)
십자가의 의미는 바로 모든 가치의 전도다. 그러나 이것은 목사의 아들 니체가 어려서부터 전해 받았음이 분명한 "순종하는 태도"(글자 그대로는 "십자가를 향해 기어감")와 같은 유약한 자기비하나 뒤틀린 마음자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가치의 전도란 오히려 치명적인 위험 앞에서도 두려움 없는 씩씩한 일상의 삶, 어찌해도 피할 수 없는 투쟁과 온갖 괴로움, 아니 죽음조차도 꿰뚫고 나가는 삶을 살아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삶은 흔들리지 않는 신뢰("믿음")와 참된 자유, 사랑, 인간다움 그리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이라는 목표에 대한 희망에 터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치욕스러운 걸림돌이 곧장 놀라운 구원의 체험이 되었고, 십자가의 길은 씩씩하게 걸어갈 수 있는 생명의 길이 되었다. (73-74) 이로써 그리스도교를 유다교뿐 아니라 다른 모든 종교 및 인본주의와 구별해주는 것이 명백히 규정되었다. 그리스도교를 구별해주는 것은 바로 십자가에 처형당했으나 그런데도 살아 있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공허한 신조나 교리정식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75)
이러한 관점에서 이제 그리스도교는 참으로 철저한 인본주의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 실존은 인간 실존을 온전히 포괄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인본주의라는 낱말 앞에서 접촉, 오염 공포 따위를 느낄 까닭이 없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철저한 인본주의를 대변, 대표, 옹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토록 이율배반적인 인간의 삶과 저토록 갈등 가득한 사회 안에서, 이상주의적 신(新)인본주의가 말했던 모든 진,선,미와 인간다운 것을 긍정하기만 할 뿐 아니라, 이에 못지않게 현실적으로 온갖 위, 악, 추와 비인간적인 것에 대결하기도 감행한다. 그렇게, 바로 그렇게만 이 세상 삶 안에서 참된 행복도 얻어 가질 수 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묘하게 만들어낸 끝내주는 체험이나 끊임없이 갈구되는 절정감을 통해서가 아니라, 곤경과 영혼의 나락 안에서도 견지되는, 현실의 삶에 대한 만족에 터한 근원적인 행복감을 통해. (78)
수많은 사람이 삶의 방향 설정을 갈망하고 있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한 분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이 물음에 답을 제공한다. 수많은 사람이 인생길의 이정표를 갈망하고 있다. 우리는 무엇에 의지해야 할까? 한 분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이 물음에 답을 제공한다. 수많은 사람이 삶의 용기와 기쁨을 갈망하고 있다. 우리는 어디서 그 힘을 얻을 수 있을까? 성령에 대한 믿음이 이 물음에 답을 제공한다. (62)
1. 한 분 하느님에 대한 믿음
그리스도교는 전형적인 예언자적 종교다. 구원 사건에서 결정적 주도권이 하느님께 있으며, 인간은 본성적으로 그분과 같을 수 없고 인간적 노력을 통해 같아질 수도 없다. 이 말이 뜻하는 것, 인동 종교에서처럼 합일의 신비나 중국 종교에서처럼 세계 조화가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의 마주섬이 당초부터 그리스도교의 바탕을 규정하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거룩하신 하느님과 죄스러운 인간의 대면의 종교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믿음을 통해 상호소통의 종교가 된다. (63)
구약 성서 윤리의 특징은 그러므로 새로운 윤리적 규범들의 창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래된 규범들이 그것들을 정당화하고 수호하시는 야훼의 권위와 계약에 뿌리박게 한 데 있다. 기존 윤리를 하느님과의 새로운 관계에 끌어들임에 있다. 이러한 신율은 윤리적 규범들의 자율적 발전을 전제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새로운 길로 나아가게 한다. ... 그러므로 하느님 자신이 참된 인간성의 변호자시다! 인간의 경험과 그것에 대한 판단에 터하여 자율적으로 생겨난 규범들이 토라 안에서 비인격적 율법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의 요구로 나타난다. 과연 십계명은 인간들의 인간다움을 위한 기본적 정언명령이다. (66)
2. 예수 추종
예수는 이스라엘 하느님의 일을 자신의 일로 삼았다. 이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뜻을 예수는 인간의 구원을 겨냥하며 앞서서 선포하고자 했다. 그래서 예수가 요구한 것은 그저 하느님 계명 준수의 갱신 정도가 아니라 사랑이었다. (68) 그는 정치적, 종교적 기성 권력체제와 충돌했으나(사제도 신학자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정치적 혁명가도 아니었다(오히려 폭력 포기의 설교자였다). 외면적이거나 내면적인 떠남(탈속)의 주창자도 아니었고(금욕고행자나 쿰란 수도자가 아니었다), 경건한 결의론자도 아니었다("계명에의 기쁨"으로 충만한 바리사이가 아니었다). 그런만큼 이 나자렛 사람은 인도의 신비주의 전통과 중국의 깨달음의 전통의 위대한 대표자들(붓다와 공자 등)과 다를 뿐 아니라, 근동 셈족에서 기원하는 다른 두 종교의 대표자들(모세와 무함마드)과도 다르다. 예수는 전혀 걸림없고 열정적인 대예언자적 인물이었다. (69)
십자가의 의미는 바로 모든 가치의 전도다. 그러나 이것은 목사의 아들 니체가 어려서부터 전해 받았음이 분명한 "순종하는 태도"(글자 그대로는 "십자가를 향해 기어감")와 같은 유약한 자기비하나 뒤틀린 마음자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가치의 전도란 오히려 치명적인 위험 앞에서도 두려움 없는 씩씩한 일상의 삶, 어찌해도 피할 수 없는 투쟁과 온갖 괴로움, 아니 죽음조차도 꿰뚫고 나가는 삶을 살아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삶은 흔들리지 않는 신뢰("믿음")와 참된 자유, 사랑, 인간다움 그리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이라는 목표에 대한 희망에 터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치욕스러운 걸림돌이 곧장 놀라운 구원의 체험이 되었고, 십자가의 길은 씩씩하게 걸어갈 수 있는 생명의 길이 되었다. (73-74) 이로써 그리스도교를 유다교뿐 아니라 다른 모든 종교 및 인본주의와 구별해주는 것이 명백히 규정되었다. 그리스도교를 구별해주는 것은 바로 십자가에 처형당했으나 그런데도 살아 있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공허한 신조나 교리정식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75)
이러한 관점에서 이제 그리스도교는 참으로 철저한 인본주의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 실존은 인간 실존을 온전히 포괄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인본주의라는 낱말 앞에서 접촉, 오염 공포 따위를 느낄 까닭이 없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철저한 인본주의를 대변, 대표, 옹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토록 이율배반적인 인간의 삶과 저토록 갈등 가득한 사회 안에서, 이상주의적 신(新)인본주의가 말했던 모든 진,선,미와 인간다운 것을 긍정하기만 할 뿐 아니라, 이에 못지않게 현실적으로 온갖 위, 악, 추와 비인간적인 것에 대결하기도 감행한다. 그렇게, 바로 그렇게만 이 세상 삶 안에서 참된 행복도 얻어 가질 수 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묘하게 만들어낸 끝내주는 체험이나 끊임없이 갈구되는 절정감을 통해서가 아니라, 곤경과 영혼의 나락 안에서도 견지되는, 현실의 삶에 대한 만족에 터한 근원적인 행복감을 통해. (78)
막내가 가버린 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번 사는 인생이라는 것을..
이 삶이라는 것이 매순간 완성돼야 하는 거구나
삶을 완성시키는 것은 오랜 세월의 집적이 아니라..
'찰나' 구나..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 저는 이런 선택을 했어요..
순간에 산다..
지금 내가 이 순간에 내 인생을 완성하겠다..
언제 제일 행복했냐고 물으면..
언제나 지금이 제일 좋았던 것 같아요..
슬픈 현재나, 기쁜 현재나..
제가 이제 어린아이가 그렇게 물어본다면..
왜 사는 건가요라고 그렇게 물어본다면..
인생은 답을 구하는 시기가 아니고..
질문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다라고 말하고 싶어요..
- 지식채널 e, 아저씨의 대답, 2009. 8. 31 방송편 中 -
한번 사는 인생이라는 것을..
이 삶이라는 것이 매순간 완성돼야 하는 거구나
삶을 완성시키는 것은 오랜 세월의 집적이 아니라..
'찰나' 구나..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 저는 이런 선택을 했어요..
순간에 산다..
지금 내가 이 순간에 내 인생을 완성하겠다..
언제 제일 행복했냐고 물으면..
언제나 지금이 제일 좋았던 것 같아요..
슬픈 현재나, 기쁜 현재나..
제가 이제 어린아이가 그렇게 물어본다면..
왜 사는 건가요라고 그렇게 물어본다면..
인생은 답을 구하는 시기가 아니고..
질문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다라고 말하고 싶어요..
- 지식채널 e, 아저씨의 대답, 2009. 8. 31 방송편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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